#중국 한나라 무제 때 땅속에서 청동 솥 하나가 발견되었다. 알고 보니 까마득한 옛날 복희씨가 만들었다던 ‘신의 솥’ 신정(神鼎)이었다. 이 후 하나라 시조 우(禹) 임금은 아홉 제후들이 바친 청동을 모아 ‘아홉 개의 솥, 구정(九鼎)’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구정에 제물을 삶아 하늘에 제사 지냈다. 이 후 구정(九鼎)은 새 왕권이 세워질 때마다 옮겨지다가 진 나라가 주 나라를 멸하는 와중에 사수(泗水) 강 바닥에 가라앉아 없어졌다고 한다.
정(鼎)은 3개의 다리가 달린 솥의 모습을 나타낸 글자로 ‘솥이 세 발로 서는 것처럼 안정과 균형을 말한다. 그리고 ‘아홉 개의 발’을 뜻하는 구정(九鼎)은 민심과 덕행에 따라 왕권의 성쇠를 가름한다.
조금 다른 비유겠지만 미국에는 ‘아홉 개의 기둥’이 있다고 표현한다. 헌데 워터게이트 특종 보도와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폭로를 서술해 유명해진 밥 우드워드는 그의 저서에서 연방대법관 9명을 ‘지혜의 아홉 기둥’이라 지칭했다.
헌법재판소가 없는 미국에서 위헌심사권까지 가지고 있는 종신직 연방대법관은 중요한 시기마다 정치적 쟁점과 관련된 사건을 다루는 최종심 판사들로 보수와 진보의 균형 속에서 결정을 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 그들이 내린 판결이 미국 사회의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해서 ‘지혜의 아홉 기둥’으로 비유되는 이들 연방 대법관을 ‘저스티스(Justice)’, 즉 ‘정의’라 부르는 이유다.
이는 일찍이 27대 대통령 윌리엄 태프트가 ‘대통령들은 오고 가지만 연방대법원은 영원하다’고 표현한데서 사법부 최고 기관으로서 연방대법원의 위상과 연방대법관들의 미국 사회에서의 영향력과 그에 따른 책임의 역할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 한 예로 지난 2000년 조지 W 부시와 앨 고어 사이의 대선 결과를 둘러싸고 정치적, 사회적 의견이 양분되었을 때 연방대법원이 5대4의 판결로 플로리다 주 수검표 작업 중단을 결정했다. 앨 고어는 예정대로 검표를 진행한다면 대통령이 될 수도 있었으나 기꺼이 승복을 선택했다. ‘연방대법원 판결에 동의할 수 없지만 받아들이겠다’고 한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번에 연방대법원이 여성의 낙태권을 인정한 1973년 ‘로 대 웨이드 (Roe v. Wade)’ 판결을 49년 만에 다시 뒤집으면서 미국 전역이 들끓고 있다. ‘헌법이 낙태에 대한 권리를 부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다. 그러자 피임, 동성혼 등 다른 판결도 뒤집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권리 또한 헌법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파기할 것 아니냐는 말이다.
실제로 보수 성향의 토머스 클래런스 대법관은 ‘우리는 그리스월드, 로런스, 오버게펠 등 앞선 판례도 재검토해야 한다’며 ‘대법원은 판례의 오류를 바로잡을 의무가 있다’고 했다. 그리스월드 판결(Griswold v. Connecticut)은 1965년 결혼한 부부의 피임약 사용을 인정한 것이고, 로런스 판결(Lawrence v. Texas)은 2003년 동성애를 성범죄로 규정한 법을 파기한 것이며, 오버게펠 판결(Obergefell v. Hodges)은 2015년 동성 결혼 합법화를 말한다.
2년 전 향년 87세로 타계한 긴즈버그 (Ruth Bader Ginsburg) 연방 대법관은 ‘진보의 아이콘’ 등으로 불리며 27년간 연방 대법관을 지내면서 양성평등과 소수자를 위한 판결을 이끌며 주목 받았다. 특히 대법원이 보수적인 결정을 내릴 때마다 ‘나는 반대한다(I Dissent)’라고 외쳤고 이 말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1993년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연방 대법관에 지명된 그녀는 장암과 췌장암, 폐암을 앓고도 매일 같이 팔굽혀펴기를 하며 버텼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대법원의 보수 대 진보 5: 4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거다. 사망하기 수일 전 ‘나의 가장 간절한 소망은 새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에 교체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가 ‘사기꾼’이라고까지 불렀던 트럼프 대통령이 후임을 선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음이다. 하지만 대선을 불과 두 달도 채 안 남기고 세상을 떠난 후 연방대법원의 보수 대 진보 구성은 그녀의 우려대로5: 4에서 6: 3으로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로 대 웨이드 (Roe v. Wade)’에서 Roe 란 가명을 사용했던 주인공 맥코비(Norma McCorvey)는 원하지 않았던 아이를 낳았고 기독교로 개종한 후 입장을 바꿔 낙태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하지만 그녀는 죽기 직전 낙태 반대운동 단체들에게서 돈을 받고 그런 것이며 낙태 권리는 보장돼야 한다고 밝혀 또 한번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이 판결의 운명이 맥코비의 변심과 같이 하는 것일까?
갤럽 조사에 따르면 ‘대법원을 신뢰한다고 응답한 미국인은 25%에 그쳤다.’ ‘지혜의 아홉 기둥’으로 불리는 대법원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까?
32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1936년 대공황 극복을 위해 입법한 뉴딜 정책을 연방 대법원이 위헌이라고 판시했을 때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아홉 명의 늙은이가 나라를 망치는구나!’ 지금도 맞는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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