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문화에서는 수사관이나 탐정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나 영화가 많다. 드라마마다 다 특색이 있지만 시청자들은 살인사건 범인이 누구일까 추측하고 풀어나가며 쾌감을 느낀다. 그리고 살인범이 마침내 잡혔을 때 안도감을 느낀다. 그런데 미국의 대중문화에서 범죄수사물이 인기있는 이유가 스릴있고 예측불허의 반전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무엇보다 미국인들이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서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보고 싶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미국인들에게 ‘정의’는 법을 지키는 것이다. 남에게 해를 끼치면 거기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미국인들의 정의감이다. 영화나 드라마 속 수사관들은 지독히 냉철하게 감정의 표출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해 나간다. 자신이 수사관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않으면 사회는 ‘불의’가 판치는 곳이 된다.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아도 괜찮은 사회. 그곳이 지옥임은 그들이 잘 알고 있다.
어렸을 때 나는 특히 “형사 콜롬보”를 좋아했다. 그 드라마에서 범인은 언제나 돈 많고 권력있고 남부러울 것 없는 때로는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사람들이었다. 콜롬보는 교양있고 반듯해 보이는 그들도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임을 꿰뚤어본다. 고물차를 끌고 다니고 후즐근한 바바리 코트와 낡은 구두에 어느 하나 뽐낼 것 없는 이 어리숙해 보이고 잘생기지도 않은 왜소한 체구의 형사는 위풍당당한 상류층 용의자 앞에서 기죽지 않고 송곳같은 질문을 해댄다. 그리고 범인 하나는 기차게 잘 잡아낸다.
이 드라마의 메세지는 무엇일까? 나에게 그것은 모든 시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이다. “형사콜롬보” 같은 드라마의 시청자들은 비록 허구의
이야기지만 법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집행되는 것을 확인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백만장자도 권세있는 정치인도, 저명한 음악가도 자신의 범죄행위에 대해 똑같이 법의 심판을 받는다. 사회의 엘리트라고도 할 수 있는 그들이 사회에 공헌한 게 없었을까? 노벨상을 탔을 수도 있고 감동적인 예술 작품을 만들었을 수도 있고 엄청난 금액의 기부금을 남 돕는 일에 냈을 수도 있고 시민들에게 좋은 정치를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과거에 훌륭한 일을 했어도, 심지어 나라를 구했어도, 살인을 저질렀다면 법에 따라 그에 응당한 댓가를 치러야 한다. 이게 법치사회의 평등이고 정의다.
그러나 이러한 법치주의적 정의와 평등의 개념은 아직 한국문화에서는 낯선듯하다. 이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자살 이후 그의 지지자들이 느꼈던 격한 슬픔과 혼돈 그리고 피해자를 향한 분노에 잘 나타난다. 박원순 지지자들은 우선 망자 박원순에게 서울특별시의 이름으로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줌으로써 법치사회에서의 ‘정의’의 실현을 거부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장례위원이 1400명인지 1500명에 달하는 대규모 장례식이었다. 한국사회에서 상례는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만이 애도하는 사적인 행사가 아니다. 양반사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상례는 망자의 사회적 지위와 성취가 과시되는 공적인 행사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추모하러 왔는가는 망자의 사회적 위세를 보여준다. 그의 사회적 위세는 바로 남은 자들의 위세이기도 하다. 또한 상례는 살아있는 자들 간의 결속이 이루어지는 정치 현장이기도 하다.
박원순 지지자들은 공적 장례식을 통해 그의 흔들리지 않는 사회적 위상을 자신들과 피해자에게 각인시키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지지자들을 동원하는 것은 이전의 포스팅에서도 몇 번 언급했듯이 전통적인 농민 사회의 분쟁해결방법이다. 유교적 농민 공동체에서 법은 멀었고 그때 그때 여론에 따라 분쟁과 갈등은 해결되었다. 그리고 여론 형성에 중요한 것은 당사자들이 살아온 내력과 그 인물에 대한 공동체 안에서의 도덕적 평판이었다.
박원순을 추모한 많은 지지자들은 박원순이 성추행이라는 범죄를 저질렀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그럴 사람이 아니다.”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그는 무죄이다” 대신 그들은 박원순의 높은 ‘도덕성’을 칭송하였다. 박원순은 ‘정의를 추구하며’ ‘고매하게’ 살아왔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와 서울 시를 위해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해 ‘큰일’을 하였고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따뜻하고’ ‘온화하며’ ‘맑고’ ‘깨끗한’ 사람이다. 그들이 박원순을 진심으로 존경했고 따랐다는 것을 나는 그들이 쓴 글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성추행이 있었음을 인정하는 사람들도 그가 죽음으로써 죄값을 치룬 ‘순수한’ 사람이라고 강변하였다. 그의 자살은 그가 자신에게 얼마나 엄격한지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들은 결코 박원순과 그의 피해자를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내 주변에서 박원순을 옹호하고 동정적이었던 평범한 주부들은 직설적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큰일’을 하는 사람을 여자 한 사람이 망쳐놓았다고. 그들의 관점에서 박원순은 큰일을 하는 남자, 즉 나라와 사회를 위해서 막중한 임무를 맡은 남자이고 피해자는 큰일하는 그의 심기까지 편하게 해주어야 하는 아녀자이다. 어디 아녀자가 막중한 일을 하는 사람의 발목을 잡다니 괘씸한 것 같으니라고. 피해자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또 다른 지지자들은 고뇌했다. 애도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들은 박원순의 범행을 인정하면서 혼돈에 빠졌다. 한 편으로는 인권 변호사로서, 특히 여성인권을 위해 많은 업적을 이루어냈는데 다른 한 편으로는 몇 년 씩 성추행하고 성희롱한 그의 모순된 인생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무조건적인 애도와 번민의 공존은 사랑하는 가족이나 애인 또는 아주 가까운 친구가 어떤 중대한 범행을 저질렀음을 알았을 때 느껴야 하는 혼란스러움이다. 만약 박원순이 사랑하는 내 가족이었다면 나도 비슷하게 무조건 그를 지지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원초적인 가족사랑의 극단적인 형태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난 박 전 시장의 유가족의 슬픔과 고뇌는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아내이고 자식이니까 그럴 수 있다. 그런데 2만 여 명이 장례식에 다녀갔다고 한다. 가족도 아닌 지인들이 무조건적으로 그를 애도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박원순의 지지자들이 느꼈던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과 상실의 슬픔, 그리고 적나라하게 드러난 모순된 인생 앞에서의 혼돈을 보니 그들이 하나의 거대한 종교집단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한 핏줄임을 강조하는 유사 친족집단. 훌륭했던 조상에 어떤 도덕적 흠집도 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조상과 후손이 동일시되는 문화에서 조상의 도덕적 흠집은 내 자신의 흠집이 되니까. 내 자식은 아무 잘못 없는데 먼저 건드린 나쁜 친구가 잘못한 거라고 탓하는 부모처럼 그들은 피해자에 대한 원망과 비난을 쏟아냈다.
이렇게 원초적 사랑이 충만한 정치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일까? 이런 사회에서 법치주의가 가능할까? 사랑이 충만한 가족은 종교집단의 원형이 될 망정 근대적 정치사회의 모델은 아니다. 가족이 ‘내로남불’이 되는 것처럼 ‘의리’와 정, 도덕적 우월감으로 똘똘뭉친 유사친족집단이 배타적이고 ‘내로남불’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청와대 홈 페이지에 한 번 들어가보니 거기에는 “정의로운 사회”라는 구호가 크게 써있다. 그리고 경찰청 홈 페이지에는 “국민과 소통하는 따뜻하고 믿음직한 경찰로 국민과 함께 하겠습니다”라는 연애편지 같은 감성적인 글귀가 국민을 유혹하고 있다.
🔺 김은희 교수는 서울대 의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문화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한국학 중앙연구원 전임 연구원으로 재직하며 일제시대의 가족변화에 관한 연구프로젝트를 수행한 바 있다. 주요 논문으로 “From Gentry to the Middle Class: The Transformation of Family, Community, and Gender in Korea”(박사학위논문), 「도시 중산층의 핵가족화와 가족 내 위계관계 변형의 문화적 분석」(『한국문화인류학』, 1995), 「문화적 관념체로서의 가족: 한국 도시 중산층을 중심으로」(『한국문화인류학』, 1995), “‘Home is a Place to Rest’: Constructing the Meanings of Work, Family and Gender in the Korean Middle Class”(Korea Journal, 1998), “Mothers and Sons in Modern Korea”(Korea Journal, 2001), 「대가족 속의 아이들: 일제시대 중상류층의 아동기」(『가족과 문화』, 2007) “도시 중산층 기혼여성의 취업과 부부 역할:’자기 일’의 정치학”등이 있다.
🔺 본 사이트에 실린 김은희 교수의 글의 저작권은 전적으로 김은희 교수에게 있습니다. 무단전재는 저작권법에 위배됩니다.
관련기사 김은희 칼럼(3)🔺민주주의⋅ 덕치⋅ 법치:양반정치 갇힌 민주당
누가 도덕적으로 우월한가? :신양반사회의 도래..김은희 칼럼(2)
🔺김은희의 문화역사 칼럼🔺 양반사회와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