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티가 나겠지만, 모르고 보면 감쪽 같다.”
‘영원한 22살 가상 인간’ 로지(ROZY)를 본 누리꾼 반응이다. 로지는 싸이더스 스튜디오 엑스가 선보인 국내 최초 가상 인플루언서로, 지난해 신한라이프의 TV 광고에 등장해 아이돌 가수 못지 않은 춤 실력으로 주목 받았다. 피부결, 솜털까지 표현될 정도로 정교한 외형을 갖춘 로지는 인스타그램에서도 인기다. 팔로워 11만4000여명이 로지의 일상을 확인하고 ‘좋아요’를 누른다.
가상 인간은 ‘실재감테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시다. 김난도 서울대학교 소비자학과 교수는 ‘트렌드 코리아 2022’에서 올해 트렌드 키워드 중 하나로 실재감테크를 제시했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상의 공간을 창조해 생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기술이라는 설명이다.
가상 인플루언서들은 다양한 분야로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롯데홈쇼핑이 자체 개발한 가상모델 루시는 지난달 22일 TV홈쇼핑 방송을 통해 쇼호스트로 데뷔하고 목소리를 최초 공개했다. 루시의 얼굴은 MZ세대들이 선호하는 특성을 조합해 디자인됐다. LG전자가 지난해 1월 선보인 김래아는 가수 데뷔를 앞두고 있다. LG전자가 지난 11일 국내 엔터테인먼트 기업 미스틱스토리와 김래아의 가수 데뷔를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하면서다.
기업들이 가상 인간을 개발하거나 홍보에 활용하는데 경쟁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이 분야에 대해 커지는 대중들의 관심 때문이다. 가상 인간의 활동 배경이 되는 가상현실(VR), 메타버스 기술은 디지털에 익숙한 세대를 중심으로 퍼지면서 새로운 트렌드로 부상했다.
사람들은 ‘나와 닮은 가상 인간이 나처럼 생각하고 말하기’를 기대하는데, 컴퓨터그래픽(CG)의 발전으로 현실과 흡사한 구현을 넘어 대중들이 가장 원할 만한 개성을 가진 인간형을 비교적 손쉽게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렇게 탄생한 가상 인간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일상을 공유하고 대중과 소통하기 시작하면서 이들은 충분히 애착을 가질만한 대상으로 거듭났다. 과거 애매하게 유사한 가상 인간에 느끼는 대중의 괴리감 즉, ‘불쾌한 골짜기’가 다방면으로 해소된 것이다. 친근감을 느낄만한 새로운 존재의 등장은 자연스럽게 소비로 연결되고 있다.
가상 인간의 ‘낮은 위험도’는 기업뿐 아니라 소비자에게도 장점이다. 기업에게 가상 인플루언서는 연예인·실제 인플루언서와 달리 사생활 논란에 휘말릴 위험이 없다는 점에서 크게 선호된다. 일반 대중인 소비자가 좋아할만한 연예인을 현실에서 찾으려면 많은 노력과 시행착오가 필요한데, 가상 인간은 스캔들에 휘말려 배신감을 주거나 실망시킬 여지가 없다.
기업 입장에서는 가성비도 무시할 수 없다. 10억원을 웃도는 유명 연예인의 모델료와 비교했을 때 가상 인플루언서는 몇천만원 수준에서 개발할 수 있어 경제적이다. 홍보 목적에 맞게 이미지를 자유롭게 설정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아직 경쟁이 치열하지 않은 분야여서 로지나 루시처럼 인지도가 생기면 투자 효과는 더욱 커진다. MZ세대(1980년 초~2000년 초 탄생)를 공략해야 하는 기업의 경우 가상 인플루언서에 대한 MZ세대의 수용도가 높다는 점에서 광고와 맞춤형 마케팅을 동시에 할 수 있어 비용이 절감된다. 기업에게 혁신적인 이미지를 심어준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가상 인플루언서를 활용한 마케팅 효과는 수치로도 보여진다. 지난해 9월 로지와 전속 모델 계약을 맺은 LF ‘질바이질스튜어트'(JILL BY JILLSTUART)는 ‘로지 픽(Pick) 가방’으로 ‘레니백’을 선보였다. 화보 공개 직후 해당 라인은 출시 초반보다 3배 가까이 빨리 팔렸고, 한 달간 2차례 재생산에 들어갔다. 지난해 10월 로지를 공식 앰버서더로 발탁한 W컨셉도 홈페이지에서 화보를 선보인 뒤 앱 방문자가 50% 증가하고 매출이 늘어나는 효과를 봤다.
가상 인간이 주목 받으면서 시장 규모도 급격히 성장할 전망이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가상 인플루언서 시장 규모는 지난 2021년 2조4000억원에서 2025년 14조원으로 커질 것으로 관측됐다. 이는 실제 인플루언서(13조)를 넘어서는 규모다.
최근 대중들 앞에 선을 보인 가상 인간들이 실제에 가깝게 구현돼 큰 관심을 받고 있지만 앞으로는 대중과의 소통 등을 더욱 발전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김상균 강원대 산업공학과 교수는 “현재 나온 가상인물들은 사람의 피부나 모공까지 그대로 재현해내는 ‘메타휴먼’ 기술이 활용돼 시각적으로 동질화가 잘 돼 있다”며 “일부는 인공지능에 의해 자체적으로 생각하고 활동하는 것처럼 보여지다 보니 독립적인 하나의 개체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다만 “시각적인 부분보다 중요한 건 얼마나 사람처럼 대화할 수 있을까”라며 “사람은 의사소통에 있어서 시각적인 부분보다 대화가 되는지를 좀 더 중요하게 본다. 캐릭터만 봤을 때 아이콘만 뜨거나 정지 이미지인 챗봇도 대화하기 시작하면 어느 정도 사람으로 인식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