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산 무기체계에 의존해온 유럽이 ‘킬 스위치(장비를 원격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는 시스템)’ 위험성을 우려하면서 미국산 무기 구매를 재고하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보도했다.
23일(현지 시간) WP는 “미국이 우크라이나와 정보 공유를 중단하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캐나다와 그린란드를 합병하겠다고 위협하면서, 워싱턴이 압박의 일환으로 전투기를 지상으로 착륙시키거나 발사대를 원격으로 끌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고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킬 스위치’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주요 부품과 정보통신망 등 공급이 차단될 경우 전투기 등을 실질적으로 사용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전문가 분석이 나온다.
미국이 전투기, 방공 미사일 등 무기와 위성항법장치 등 첨단 장비 분야에서 핵심 부품·소프트웨어 공급을 중단할 경우 기능 유지 자체가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한 정부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킬 스위치)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모든 항공기가 하늘에서 떨어질 것 같지는 않다”면서도 “정보공유와 통신 링크에 대한 의존성이 문제”라고 짚었다.
벤 호지스 전 주(駐)유럽미군사령관은 미국이 우크라이나 정보 지원을 중단한 것을 언급하며 “사람들은 ‘(정보 지원을) 그냥 켜고 끌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물었다”며 “국가들은 미국 부품이나 네트워크에 대한 불확실성을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21일 차세대 전투기 F-47 생산 계획을 발표하면서 “언젠가는 그들이 우리의 동맹국이 아닐 수도 있다”며 동맹국에 판매되는 전투기는 성능이 제한된다고 밝힌 것도 유럽의 우려를 키웠다는 분석이 나온다.
WP는 “미국은 1979년 이란에 항공기 유지관리 및 예비부품을, 2013년 이집트에 제트기·헬리콥터 등 장비 선적을 동결했으나 워싱턴이 동맹국에 대해 그런 조치를 취한 적은 거의 없었다”고 지적했다.
일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국가들은 실제로 미국산 무기 구매를 재고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은 F-16 전투기를 최신 F-35로 교체하는 계획을 백지화했다. 누누 멜루 국방부 장관은 “최근 나토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최선의 선택을 고민하게 만든다”며 “이 동맹국은 항공기가 어떤 경우에서도 작동될 수 있도록 하는 유지보수와 부품 공급을 제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캐나다 역시 미국 록히드마틴과 F-35 88대 도입 계약을 맺었으나, 지난 15일 마크 카니 총리 지시로 이를 전면 재검토한다고 밝혔다.
‘유럽 무기 우선 구매’를 내건 유럽연합(EU)은 1500억 유로(238조여원) 규모의 무기 조달 자금을 EU 회원국이나 EU와 방위협정을 맺은 국가에만 대출해주기로 한 상태다.
라스무스 야를로우 덴마크 의회 국방위원장은 최근 덴마크의 F-35 전투기 구매 결정에 유감을 표하며 “앞으로 가능하면 미국 무기를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이 덴마크에 그린란드를 요구하며 ‘무기를 비활성화하겠다’고 위협하고, 우리가 이를 거부한 뒤 러시아가 우리를 공격하는 상황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며 “미국 무기를 사는 것은 감수할 수 없는 안보 위협”이라고 덧붙였다.
유럽이 2020~2024년 유럽 무기 수입의 64%를 차지했던 미국 무기 수입을 줄여나갈 경우, 최대 수혜국은 프랑스가 될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는 2020~2024년 기준 세계 2위 무기 수출국이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전문가들은 프랑스 항공 산업이 F-35에 대한 반발의 큰 수혜자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며 ” 마크롱 대통령은 ‘라팔 제트기(프랑스의 대표적 전투기)’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