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지구적 천재지변이나 핵 전쟁과 같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대재앙에 대비해 종자 보관소 등을 지구 밖 달에 지을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학계에서 나오고 있다. 기후 변화로 인한 보존의 어려움, 실제 대재앙 발생 시 접근 문제 등이 있는 만큼 마치 성경 속 ‘노아의 방주’처럼 지구 밖에 생물 다양성 보존을 위한 안전 공간을 만들어 놔야 한다는 것이다.
3일 학계에 따르면 국제학술지 사이언스(Science)는 최근 미국 스미소니언 국립동물원 및 보전 생물학 연구소 생물학자인 메리 헤게돈과 유전학·공학·지질학 분야 전문가들이 언급한 달에서의 생물 다양성 보존 방법에 대해 소개했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미네소타대학교 등 공동연구진은 지구의 생물다양성과 미래 우주탐사를 위해 생물 보존용 저장고를 우주 공간에 만들 필요가 있다는 내용의 논문을 지난달 30일 ‘바이오 사이언스’에 발표한 바 있다.
세계 각국은 식물 씨앗을 보관하는 종자 저장고를 보유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운영하는 국립종자원도 하나의 예시다. 이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노르웨이의 거대한 종자 저장고인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다. 이 저장고는 전 지구적 대재앙이 닥쳤을 때를 대비해 수백만 종의 식물 씨앗(종자) 자원을 영구 보관하고 있다. 별명 또한 ‘최후의 날 저장고’라고 명명됐을 정도다.
스발바르 저장고는 북극점에서 약 1300㎞ 떨어진 영구동토층 아래 위치해 있다. 이 덕분에 1년 내내 온도를 영하 18℃로 유지해 종자의 물질대사를 늦추고 발아를 막은 채 보관이 가능하다. 저장고의 전기가 끊기는 등 비상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영구동토층으로 인해 영하 3.5℃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후의 날’에 대비하는 만큼 해수면 상승이나 지진 등에도 버틸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하지만 최근 이같은 저장고에도 변수가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스발바르 저장고의 경우에도 지구 온난화로 인해 영구동토층이 녹아내리며 저장고 내부로 물이 유입된 바 있다. 종자들이 손실되진 않았으나, 수백년 뒤 해수면까지 고려해 종자의 영구 보존을 목표로 만들어졌음에도 기후 위기의 영향을 받게 된 셈이다. 스발바르 외의 다른 저장고들에서도 자연재해 등으로 인해 보관 중인 샘플들이 유실되는 사례가 있었다.
논문 저자들은 필수적인 식물 종자들 뿐만 아니라 꿀벌처럼 꽃가루를 옮겨주는 수분 매개자, 멸종위기종 등도 우주에서 냉동 보관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다. 달에 생물 저장고를 구축하는 것이 기술적·과학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생물 종자의 장기 보존을 위해서는 영구동토층처럼 저온 환경이 유지돼야 하는데, 달에서는 이 역할을 태양빛이 들지 않는 ‘영구 음영 지역’이 맡아줄 수 있다. 다만 태양빛이 들지 않는 만큼 시설 구축을 위한 로봇 등의 배터리 수명에 한계가 있는 것이 문제다. 이같은 문제가 해결되면 향후 20년 내 달에서의 구축 작업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또한 생물의 세포들을 우주 방사선 등에서 보호하기 위한 차단재 등도 마련돼야 한다. 실제 구축에 앞서 국제우주정거장(ISS) 등에서 우주 방사선에 장기 노출된 세포들에서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지 등의 연구도 필요할 전망이다.
연구진은 이처럼 달에 대규모 생물 저장고가 구축되면 미래 생물 다양성을 존속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주비행사들을 위한 일종의 ‘식량 창고’ 역할까지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미래 화성 식민지화 계획이 추진되면 달이 그 전초기지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때 저장고가 다양한 식량용 식물들을 보관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이다.
다만 연구진은 기술적 문제보다 ‘정치적’ 문제, 즉 거버넌스가 가장 큰 난관이 될 것이라고 봤다. 이미 각국이 달의 영유권, 개발권 등을 두고 눈치 싸움을 시작한 만큼 생물 저장고를 어떻게, 누가 구축·관리 할지 등에 있어서 갈등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한 연구진은 “전 이 일을 끝마치지 못할 것이라고 본다. 단지 우주 노아의 방주가 잘 시작되고 추진되길 바랄 뿐”이라며 “많은 좌절이 있겠지만 한 발자국씩 계속 나아가면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세계에 엄청난 선물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