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에 열린 94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이변이 있었다. 거의 모든 부문에서 고개가 끄덕여지는 결과가 나왔는데, 가장 중요한 작품 부문에서 예상에 없던 ‘코다’가 수상한 것이다. ‘코다’는 남우조연 부문에서 유력하고 각색상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작품 부문에선 사실상 논외였다. 아카데미 전초전으로 여겨지는 골든글로브나 영국 아카데미는 물론이고 앞서 열린 어떤 시상식에서도 ‘코다’는 작품상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이 영화를 만든 션 헤이더 감독은 아카데미에서 감독상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으며, ‘코다’가 작품상을 받을 정도로 완성도 있는 영화라고 보는 이들도 거의 없었다.
‘코다’는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청인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 당시 언론은 아카데미가 이 영화를 선택함으로써 다양성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갔다고 평했다. 10여년 전부터 아카데미가 시도해온 성(性)·인종·국적 등 장벽 허물기의 정점이었다는 분석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고, 의미 있는 행보였으나 ‘코다’가 작품상을 받을 수 있었던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투표 방식이다.
아카데미 수상자(작)은 회원 투표로 이뤄진다. 그런데 투표 방식이 우리가 흔히 아는 것과 조금 다르다. 아카데미는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한 작품을 고르게 해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후보를 고르는 게 아니라 최종 후보 간 선호 순위를 정하는 선호투표제를 쓰고 있다. 이 투표제의 가장 큰 특징은 1순위 지명이 과반을 넘는 압도적인 후보가 없을 경우 1순위 표를 많이 받지 못했더라도 상위권 순위에 다수 지명되면 최종 1위 가능성이 생긴다는 점이다. 그래서 당시 ‘코다’가 작품상을 받을 수 있었던 건 1순위 표가 여러 후보작에 고르게 나뉘어진 상황에서 2~3순위 표를 다수 확보한 덕분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2년 전 수상 결과를 언급한 건 올해 작품·각본 부문 후보에 오른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가 ‘코다’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 전에 열리는 주요 시상식에서 수상하지 못한 채 작품 부문 후보에 올랐고 감독 부문 후보에 들지 못했지만, 충분한 의미를 갖고 있는 작품이라는 점 등이 그렇다.
한국계 캐나다인 셀린 송(Celine Song·36) 감독이 만든 이 작품은 한국인·한국계 감독이 만든 영화로는 2020년 ‘기생충’, 2021년 ‘미나리’ 이후 작품 부문 후보에 오른 게 세 번째이며, 각본 부문 후보에 오른 것 역시 ‘기생충’ ‘미나리’에 이어 세 번째다. 아시아계 여성 감독의 첫 번째 영화가 오스카 후보가 됐다는 점에서 현지 매체들도 한목소리로 “파란을 일으켰다” “새로운 역사”라고 했다.
후보에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역시 관심은 ‘패스트 라이브즈’가 후보 지명을 넘어 오스카를 품에 안을 수 있느냐로 모아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작품이 수상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러나 ‘코다’ 사례가 다시 한 번 일어난다면 깜짝 수상도 기대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패스트 라이브즈’는 아카데미 레이스에서 이미 다른 영화를 압도한 ‘기생충’의 방식이 아니라 이를 테면 ‘2위 전략’을 쓴 ‘코다’ 모델을 참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패스트 라이브즈’가 작품상을 받을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얘기한 건 대세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 오스카에 가장 근접한 거로 평가 받는 작품은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오펜하이머’다. ‘오펜하이머’는 작품·감독·남우주연·남우조연·여우조연·각색·편집 등 13개 부문 후보에 올라 가장 유력한 후보라는 걸 증명했다. 골든글로브·크리틱스초이스 등 앞서 열린 주요 시상식을 휩쓸었고, 다음 달 열리는 영국 아카데미에서도 싹쓸이가 예상된다. 다른 영화를 압도할 만한 작품이 없었던 ‘코다’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그러나 이변이 없을 거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아카데미 작품 부문이 다른 시상식과 다른 건 후보가 10편이라는 점이다. ‘오펜하이머’라는 대마(大馬)가 있긴 해도 선택지가 워낙 다양한 만큼 1위표가 ‘오펜하이머’ 외 작품으로 갈릴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고, 그렇게 된다면 ‘패스트 라이브즈’에도 기회가 돌아갈 수 있다. 이제 문제는 ‘패스트 라이브즈’가 선호 투표에서 과연 상위권에 오를 수 있느냐가 된다. 작품 면면을 볼 때 이 영화는 상위 지명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작품 내외 모두에서 표를 던질 만한 명분이 있다. 우선 완성도. ‘패스트 라이브즈’가 빼어난 영화라는 덴 이견이 없다. 일례로 전 세계 언론 리뷰와 평점을 종합해 점수를 매기는 메타크리틱에서 ‘패스트 라이브즈’는 100점 만점에 94점을 받았다. 작품 부문 경쟁작인 ‘오펜하이머’는 89점, ‘가여운 것들’은 87점, ‘바비’는 80점이다. 평점이 영화를 온전히 평가할 순 없다고 해도 ‘패스트 라이브즈’가 현지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평가를 받고 있다는 건 확인할 수 있다. 가장 대중적인 평점 사이트인 로튼토마토에서도 이 영화는 96%를 기록 중이다. 흔히 하는 표현으로 ‘평단과 관객을 모두 만족시킨’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아카데미의 최근 트렌드에도 딱 들어맞기도 하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최근 10여년 간 아카데미가 영점을 맞춰 놓은 과녁은 다양성이다. 2010년 ‘허트 로커'(첫 여성감독)에 이어 2014년 ‘노예 12년'(첫 흑인감독), 2015년 ‘버드맨'(첫 비영어권 감독), 2020년 ‘기생충'(첫 아시아 감독) 2021년 ‘노매드랜드'(첫 아시아 여성 감독)가 그랬고, 2022년 ‘코다’와 지난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역시 이런 흐름이 반영된 작품상 수상작이었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한국어 대사가 영어 대사만큼 많고, 많은 장면을 한국에서 찍었으며, ‘인연’이라는 한국적 정서를 투영했다. 게다가 30대 여성 감독 연출작이라는 점, 그의 데뷔작이라는 점도 높은 순위를 받을 수 있는 요소들이다.
셀린 송 감독은 ‘패스트 라이브즈’가 아카데미 최종 후보에 오른 뒤 현지 매체와 인터뷰에서 “첫 영화로 아카데미라니…미쳤다(crazy)”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 영화에 대해 “영화에 담긴 인연이라는 개념은 동일한 장소, 동일한 시간에 존재함으로써 느끼는 기적적인 연결과 사랑의 감정을 의미한다”며 “이는 우리가 전생에서 공유한 수많은 생에 대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패스트 라이브즈’를 만들면서 제작진과 인연임을 깊이 느꼈다”고 말했다. 이제 셀린 송 감독과 아카데미의 미친 인연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지켜봐야 한다. 제96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은 오는 3월10일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