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21일 ‘조 바이든’대통령은 2024년 대통령 선거전에서의 후보직 사퇴를 전격적으로 선언했다. 처참하게 실패한 트럼프와의 첫 번째 TV토론회 이후 후보직에서 사퇴하라는 당내외의 여론에 버티다가 결국엔 두 손을 들었다. 선거판이 충격에 빠졌다. 밀워키에서 공화당 전당대회가 막 끝나서 모든 미디어의 헤드라인에 트럼프기사가 넘치려는 찰나에 바이든대통령의 후보사퇴 선언은 선거판에서 트럼프를 사라지게 했다. 그가 총을 맞은 일도 그의 러닝메이트가 J.D Vance라는 뉴스도 완벽하게 실종되었다. 대통령의 후보사퇴가 마치 공화당의 컨벤션 효과를 차단하려는 각본에 의한 연출같이 생각이 들 정도다. 알려진 바로는 바이든 대통령은 전날 토요일 오후에 측근들과 가족들에게 사퇴의 뜻을 밝혔고 당일 오전에 보좌관을 통해서 해리스 부통령에게 전했다. 후계에 관해서는 자유경쟁을 시킬 것이 아니고 부통령이 이어받도록 하는 것이 분열을 방지하는 최선이라고 판단을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사퇴 선언과 동시에 부통령인 ‘카멀라 해리스’가 자신을 대신해서 민주당의 후보가 되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그리고 약 한 시간 후에 그는 직접 해리스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서 후보직을 붙들고 당의 균열을 막으라고 했다.
대통령의 전화를 숨죽이며 기다리던 해리스 부통령의 옆에는 딱 한사람, 그녀의 제부인 Tony West가 자리를 지켰다. 바이든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전화로 후보직을 물려받음과 동시에 해리스는 곧바로 델라웨어 윌밍턴의 캠페인 본부로 향했고 Tony West는 캘리포니아의 실리콘벨리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바이든의 후보사퇴를 압박해온 풀뿌리단체들은 뉴스를 접하자마자 행동에 돌입했다. 시민사회의 각종 풀뿌리 조직들로부터 ‘카멀라 해리스’를 지지하는 성명이 쏟아졌다. 하루 만에 무려 1억 달러의 액수가 개미군단으로부터 모금되었다. 토니 웨스트가 준비해 온 실리콘 벨리의 100여명의 부자들이 ‘카멀라 해리스’를 위한 수퍼팩에 수천만 달러를 입금시키면서 각 주별로 대의원들의 잇따른 해리스지지 선언이 나왔다. 후보직에 눈독을 들이는 민주당내 대권주자들이 옴짝달싹 하질 못했다. 당의 균열을 예고하는 권력투쟁이 고개도 들지 못하고 완벽하게 제압당했다.
해리스는 수년 동안 준비하고 싸워도 될까 말까한 대통령 후보직를 순식간에 거머쥐었다. 백악관 2인자의 자리를 없는 듯 있는 듯 하면서 오직 대통령으로부터의 신임만을 목표로 몸을 낮춰 온 ‘카멀리 해리스’의 권력 의지를 입증하는 순간이다. 그동안 부통령의 존재감이 없다느니, 가장 무능력한 부통령이니, 바보같이 웃음만 헤프다느니..등등의 조롱에 가까운 미디어의 언급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절치부심 일인자의 자리를 그녀가 학수고대해 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해리스의 뒷심은 오바마였다. 그녀의 제부인(동생의 남편) ‘Tony West’는 오바마정부 ‘에릭 홀더’법무부장관 밑에서 차관을 지냈다. 해리스와 오바마 사이를 오가는 해리스의 최측근으로 역할하고 있다. Tony West는 Uber에서 부사장으로 돈을 벌다가 잠시 회사를 떠나서 해리스를 그림자수행을 한다. 최초의 흑인대통령을 만들어 낸 ‘2008년 오바마팀’의 해리스팀으로의 복귀는 오바마
를 설득한 Tony Wes의 작품이다. 바이든의 후보사퇴를 예상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오바마의 움직임이 치밀하고 빨랐다. 2008년 자신의 선거를 이끈 전설적인 두 명의 데이빗(캠페인 매니저였던 ‘David Plouffe’와 캠페인 전략을 지휘한 ‘David Axelrod’)을 불렀다. 이번 목표는 흑인여성대통령이다. (2020년 대선전도 그리고 이번 선거에서도 바이든 팀을 이끌어 온 ‘마이크 도닐론(Mike Dollinion)’이나 ‘진 오말리 딜론(Jin O’Malley Dillon)’도 2008년 오바마팀에서 두 데이빗의 지휘를 받으면서 바이든 부통령을 담당했던 사람들이다) 오바마는 2008년 캠페인이 트럼프를 이기는 일에 다시 나설 것을 설득했다. ’카멀라 해리스‘부통령은 델라웨어 윌밍턴에 있는 캠페인 본부를 직접 찾아가서 바이든팀을 이끌어 온 ’진 오말리 딜론‘에게 계속해서 캠페인 전체를 총괄 지휘해 줄 것을 요청했다. (질 바이든 여사의 설득이 주효했다는 뒷이야기다) 해리스의 요청으로 오바마에 의해서 ’데이빗 플라프(2008년 캠페인매니저)‘, ’스테파니 커터(Stephanie Cutter : 멧세지전략), ‘미치 스튜어트(Mitch Stewart : 풀뿌리전략조직)가 델라웨어 윌밍턴에 합류했다. 2008년 오바마팀이 해리스팀으로 전격 복귀했다. 그리고 나서 비로소 오바마는 공개적으로 ’카멀라 해리스‘를 지지하는 선언을 했다.
부통령후보인 ‘팀 월츠(Tim Walz)’는 누구인가?
흑인아버지와 인도계 어머니를 둔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샌프란시스코의 변두리 지역을 담당하는 검사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지방 검사장이되었고 센프란시스코의 공권력 수장을 거쳐서 캘리포니아의 법무장관, 연방상원의원, 그리고 바이든대통령에 의해서 부통령에 지명되었고 마침내 미국의 대통령후보까지 왔다. 권력을 향한 그녀의 숨가쁜 여정이다. 캘리포니아 법무장관때에 범죄에 대한 지나친 강력수사를 늘 강조해서 캘리포니아 진보활동가들에겐 인기가 바닥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2020년에 시민사회 범진보계는 (더구나 BLM상황에서는) 그녀를 지지하지 않고 현재 LA시장인 ‘카렌 배스’를 부통령후보로 적극 밀었었다. 전통적으로 대통령후보는 자신의 러닝메이트(부통령후보)를 승리를 위한 균형과 보완을 계산해서 지명을 한다. 캘리포니아 해안 출신의 남아시아계 흑인여성과의 균형이면 최종후보자는 내륙 출신의 백인남성이다. 당내 진보주의자들은 서민적인 미네소타 주지사인 ‘팀 왈츠’의 진보적인 업적에 줄을 섰고 실용주의자들은 오바마 수준의 인기를 끌고 있는 펜실베니아 주지사인 ‘조쉬 사피로’를 밀어 올렸다. 해리스와 그녀의 고문들은 ‘팀 왈츠’의 알려지지 않은 업적에 높은 평가를 했다. 경합주인 러스트 벨트의 부동층에 잠재적인 매력을 갖고 있다고 평가해서 반짝반짝 빛나는 사피로 보다는 서민적이고 평범한 이미지의 왈츠를 지명했다. 그는 육군 방위군에서 복무한 베테랑이자 고등학교 사회선생님, 축구코치, 사냥을 즐겼던 총기 소지자였지만 총기규제를 강화했고 트럼프의 영향력이 강한 지역구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10선의 연방하원을 지냈으며 지금은 미네소타주의 재선의 주지사다. 최저임금을 인상했고 공립학교의 무상급식을 실시했으며 2020년 미네아폴리스에서 발생한 조지 플로이드 사망사건 때에 공권력의 횡포에 맞서서 시민의 편에 굳건히 섰다. 그는 진보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고 그가 사회적 약자인 서민위주의 정책을 폈기 때문에 진보주의자로 분류가 되었다. 동성연애자
들을 인정하고 그들의 인권을 옹호해주는 정책을 폈다. 민주당주지사협회 의장이기도 하다. 해리스의 최종 면접에서 펜실베니아 주지사인 사피로는 부통령의 역할에 대해서 많은 대화를 한 반면에 왈츠는 트럼프를 이기는 일이 아니면 자신을 지명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해리스는 같은 1964년생 동갑내기인 ‘팀 왈츠(Tim Walz)’를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지명했다.
‘해리스/왈츠’팀이 90일간 캠페인을 시작했다. 지난 8월6일 대선승리를 위해서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펜실베니아의 필라델피아에서 출정식이다. 예상을 뛰어 넘는 2만여 군중이 운집했다. 허술하고 산만했던 바이든 캠페인이었는데 조직적이며 활력이 느껴졌다. 방송과 신문에서는 “ 끊임없이 폄하하고 비열하고 분노하는 극단적인 모습에 질린 유권자들에게 낙관주의와 희망을 보여주는 캠페인을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민주당 유권자들이 안도하는 분위기다.
<김동석 미주한인유권자연대(KAGC)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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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석 미주한인유권자 연대 대표가 본보의 새 칼럼니스트로 K-News LA 독자들과 만나게 됐습니다.
김동석(65) 미주한인유권자연대(KAGC) 대표는 미국 내 최대 한국계 미국인(한인) 유권자 네트워크 KAGC를 통해 풀뿌리단계에서부터 적극적 참여를 통해 현재 250만 명으로 추산되는 한인들의 정치력 신장, 더 나아가 한·미 양국의 공조 강화를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강원 화천 출신으로 춘천고, 성균관대를 거쳐 1985년 미국으로 건너와 뉴욕시립대(CUNY) 정치학과를 졸업한 김 대표가 올해로 만 30년간 한인 유권자운동에 몸담은 건 1992년 로스앤젤레스(LA) 폭동이 계기가 됐다. 그는 “한인타운이 불타고 약탈당해도 아무도 한인들을 대변해주지 않는 현실에 충격받고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법적 보호를 받기 위해서는 어떤 민족이든 기본적인 정치력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고 말했다. 결국 그는 귀국을 포기하고 1993년 한인들을 대상으로 유권자 등록과 투표 중요성을 알리는 정치참여운동을 시작했다.
김 대표는 1996년에는 뉴욕을 중심으로 한인사회의 투표권 행사 보장 및 주·연방정부를 대상으로 한인 커뮤니티 이슈를 전달하는 비영리단체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KAVC)를 설립했다. 김 대표와 한인 유권자운동이 한국에서도 주목받은 계기는 2007년 미 연방 하원이 일본 정부의 끈질긴 로비에도 일본군위안부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하면서부터였다. 김 대표는 당시 톰 랜토스(2008년 사망) 하원 외교위원장과 마이크 혼다 의원 등을 움직여 결의안 통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08년 뉴욕에 미국시민참여센터(KACE)를 만든 김 대표는 이후 미 정치의 중심인 워싱턴DC를 공략하기 위해 2013년 전국 단위 조직인 KAGC를 결성했다. KAGC는 한인사회 현안을 200여 명의 미 연방 의원·보좌관들에게 상시 전달하는 가교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물론 전국 30여 개 지역사회 협력단체의 시민참여 교육 및 유권자등록 프로그램 개발·운영을 지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