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가 엉망진창이다. 대한축구협회를 향한 붉은악마의 야유가 국가대표 선수와의 충돌로 번졌다.
지난 5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국과 팔레스타인의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3차 예선 1차전이 0-0 무승부로 끝나자 관중석에선 야유가 쏟아졌다.
FIFA 랭킹 96위인 팔레스타인을 상대로 대량 득점을 기대했던 팬들은 실망스러운 경기력에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팔레스타인전 야유는 선수가 아닌 10년 만에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홍명보 감독에게 향했다.
주장 손흥민(토트넘)을 비롯해 대표팀 선수들이 소개될 때 나온 함성은 홍명보 감독이 나오자 야유로 바뀌었다.
홍 감독은 사령탑 선임 과정에서 공정성 논란이 일어나 비판받았다. 협회는 국가대표 전력강화위원회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지 않았고, 막판엔 이사회 의사 결정 과정도 건너뛰었다.
대표팀 감독은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던 홍 감독은 갑자기 마음을 바꿔 비난을 샀다. 특히 프로축구 울산 HD는 시즌 도중 팀을 버린 홍 감독을 ‘피노키홍’이라 부르며 분노했다.
그래서 홍 감독에겐 팔레스타인전 화끈한 승리가 절실했다. 비난을 덮을 만한 멋진 경기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결과는 더 실망스러웠다. 전술은 물론 선수들의 컨디션 관리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선수들의 표정도 어두웠다.
김민재(바이에른 뮌헨)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붉은악마 응원석으로 향해 걸어갔다. 그는 팔 동작을 하면서 야유를 자제해달라고 요구하는 듯한 제스처를 했다.
나중엔 허리춤에 양팔을 올리고 응원석을 향해 “부탁드릴께요”라고 외쳤다.
하지만 대화가 잘 통하지 않았는지 관중석을 향해 고개 숙인 손흥민 옆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관중과 대치한 김민재의 모습은 소셜미디어(SNS)와 각종 온라인 사이트를 타고 논란이 됐다.
믹스트존에서 취재진과 만난 김민재는 “선수들을 응원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사실 우리가 (경기) 시작부터 못 하진 않았다. 왜곡해서 제 SNS에 찾아와 그런 말을 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우리가 시작부터 못 하진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못하길 바라며 응원해 주시는 부분이 아쉬워서 그런 말씀을 드린 것이다. 공격적으로 할 의도는 없었고, 심각한 분위기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받아들이신다면 어쩔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이날 붉은악마의 야유가 축구협회와 홍 감독을 향한 것이었지만, 안방에서 쏟아진 비판에 선수들은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관중석을 찾아 불만을 표출한 이유다.
논란이 커지자 축구 국가대표 서포터스 붉은악마도 경기 다음 날 입장을 밝혔다.
붉은악마는 공식 SNS를 통해 “붉은악마가 탄생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선수들과 모든 순간을 함께했고 어떠한 순간에도 ‘못하길 바라고’, ‘지기를 바라고’ 응원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어 “(김민재가) 홈 응원석 쪽으로 와서 ‘좋은 응원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라는 짧은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며 “선수와 관중 간 설전은 없었다”고 전했다.
또 “간절히 승리를 바랐던 김민재가 좋은 결과가 안 나온 아쉬움에, 그리고 오해에 그랬던 것 같다. 단 표현의 방법과 장소는 매우 아쉽다”며 “지난 몇 달 간 공정과 상식이 없는 불통의 대한축구협회의 행위에 대해 목소리를 가장 잘 내고, 이목을 끌 수 있는 곳이 경기장”이라며 “거짓으로 일관하는 협회와 스스로 본인의 신념을 저버린 감독에 대한 항의와 야유였다”고 강조했다.
축구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반응은 엇갈렸다.
일부 네티즌은 “야유도 선수가 감당해야 할 문제”, “야유받았다고 관중석으로 달려오는 선수가 어디 있나” 등으로 김민재를 비판했다.
또 다른 네티즌은 “김민재가 욕먹을 이유가 없다. 야유는 과했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위기의 한국 축구다. 위르겐 클린스만 전 감독이 외유와 재택 논란 끝에 경질되고, 아시안컵 때 손흥민과 이강인(파리생제르맹)이 출동하는 등 올 초부터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후임 선임 과정에선 전력강화위원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고, 절차를 무시한 끝에 홍 감독이 선임됐다.
박주호를 비롯해 박지성, 이천수 등 전직 국가대표 선수들은 협회와 홍 감독을 비판하면서 축구계는 난장판이 됐다.
그리고 경기장에선 국가대표와 서포터스까지 충돌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다.
11회 월드컵 본선 진출에 도전하는 한국 축구는 첫 단추부터 어긋났다. 이런 흐름이라면 만만찮은 오만 원정에서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다.
오만도 객관적인 전력상 한국보다 아래지만, 2003년 10월 아시안컵 예선 당시 1-3 참패를 당한 ‘오만 쇼크’가 재현되지 말란 법도 없다.
손흥민은 팬들의 지지를 바랐다. 그는 “팬들이 원하는 감독이 있겠지만, 이미 결정된 일이다. 우리가 바꿀 수 없는 부분이다. 주장으로서 팀을 생각해서 팬들께 응원과 사랑을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이강인도 “감독님과 함께한 첫 경기였는데 응원이 아닌 야유로 시작해 매우 안타깝다. 선수들은 감독님을 100% 믿고 따를 것이다. 팬들은 당연히 아쉽고 화나겠지만 응원과 관심 가져달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