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건 당시 7세의 어린 흑인 소녀였던 플레처는 말년에도 당시 폭동 사건에 관련해 사법 정의를 구하는 데 헌신했으며 이 날 털사시내의 한 병원에서 자손들에게 둘러 싸인 채 숨을 거뒀다고 손자인 아이크 하워드가 발표했다.
평생 동안 신앙의 힘으로 생을 유지해 왔다는 플레처 여사는 자녀 3명을 키우면서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한 조선소에서 용접공으로 일 하는 등 수 십년 동안 가장으로, 가족을 돌보는 주부로 힘든 생을 보냈다.
털사 시는 그녀의 타계 소식에 애도의 분위기다. 먼로 니콜스 털사 시장은 오클라호마 제2의 도시 털사 최초의 흑인 시장으로 가장 먼저 애도를 표했다.
“플레처 어머님은 다른 누구보다도 감당하기 어려운 삶을 보냈지만, 평생 동안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굳건하게 앞길을 개척하면서 살아왔다”고 그는 말했다.
플레처가 7살이었던 1921년 5월 31일 털사의 그린우드 지역에서 시작된 인종학살은 이틀 동안 부유한 흑인 구역을 휩쓸고 백인 폭도들이 흑인 수백 명을 살해하는 참극으로 끝났다.
한 지역 신문이 흑인 남성 한 명이 백인 여성에 성폭력을 가한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는 선정적인 기사를 게재한 뒤 그 날 법원 앞에는 백인 폭도들이 속속 운집했다.
백인 군중의 수가 엄청나게 불어나자 털사의 흑인 남성들이 용의자에 대한 군중의 폭행과 처형(린치)을 막아 보려고 총들을 가지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막상 싸움이 시작되자 백인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아서 수 백 명의 흑인들이 살해 당했다.
흑인 지역 주택들은 방화로 불타고 약탈 당했으며 블랙 월스트리트라고까지 불렸던 시내 30개 구역에 걸친 일대가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플레처는 2023년에 쓴 회고록 “그들이 내 이야기를 묻어 버리지 않도록”( Don’t Let Them Bury My Story) 에서 “나는 한 때 번성했던 우리 동네가 시커먼 숯더미로 변한 광경을 평생 잊을 수 없었다. 공중에는 검은 연기가 치솟았고 이웃 사람들의 공포에 질린 새카만 얼굴들이 지금도 생각난다”고 회고했다.
가족들과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빠져 나가는 동안 그는 연기와 재로 눈이 아팠고 거리 마다 시체들이 수북했다. 길 위에서는 한 백인 남자가 흑인 남자의 머리를 총으로 쏜 다음에 그녀의 가족들을 향해서도 총을 발사했다.
플레처는 회고록 출간 뒤 AP와 가진 2024년 인터뷰에서 그 학살 사건에 대한 기억을 침묵속에 묻어 두었다는 비난이 두려워 책을 쓸 용기를 냈다고 말했다. 그는 손자 하워드가 거기에 대한 증언을 책으로 남겨야 된다고 설득했기 때문에 하워드와 함께 집필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플레처는 “우리는 그런 역사가 되풀이 되는 것을 막고 싶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그 사건에 대해 알리고 우리(미국인)가 왜 하나가 되어 살아야 하며, 왜 치유가 필요한지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고 AP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몇 대에 걸쳐서 이룩한 흑인 사회의 부와 재산, 모든 소유물이 하룻 밤에 다 사라졌던 사건이었다”고 그는 증언했다.
그 사건은 그 후 수 십년 동안 기억조차 되지 않고 있었다. 오클라호마 주에서 1997년 그 집단 폭력사건을 재조사하기 위한 위원회가 창설된 이후에야 폭넓은 논의가 시작되었다.
플레처는 2021년 미 의회에서도 자기 경험을 증언하기 위해 연단에 섰다. 당시 막내 남동생 휴즈 반 엘리스, 또 다른 학살 생존자 레시 베닝필드 랜들과 함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오클라호마주 고등법원은 2024년 6월에 이를 기각했다. 소송인들의 피해가 주법에 따른 공공의 해악 피해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이라는 게 이유였다.
플레처와 랜들은 당시 최후 진술에서 “우리가 이 생에서 살아 있는 한 미국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인 그 사건에 대해 계속 조명을 계속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반 엘리스는 그 해 이미 1년 전에 102세로 사망한 상태였다.
털사시는 학살사건 피해자 후손을 돕기 위해 여러 방안을 연구했지만 직접 현금 보상은 제외되었다. 마지막 생존자들 몇명은 플레처와 함께 민간단체의 후원금을 받은 적은 있지만 주 정부나 시 당국으로부터는 아무런 보상금도 받지 않았다.
털사의 그린우드 흑인 지역은 인종차별이 심하던 1920년대 당시엔 전국의 흑인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지만 학살 사건이후 도망쳐 나간 플레처 가족은 좋은 집과 상점 식당 병원 등 좋았던 생활환경을 빼앗기고 오랜 세월 유랑생활을 해야 했다.
플레처는 학교도 4학년 이상 다니지 못했다. 16살에 털사로 돌아와 청소부, 백화점 진열창 담당 일을 하면서 로버트 플레처와 만나 캘리포니아로 이사했고, 2차 세게대전 당시에는 로스앤젤레스의 조선소에서 용접공으로 일했다.
가정 폭력으로 이혼한 뒤 아들을 낳은 그녀는 가족들과 가까이 지내기 위해 털사로 돌아온 뒤 오클라호마주를 떠나지 않았다. 85세까지도 집안 일과 육아,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면서 평생동안 노동하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가 남긴 회고록은 1921년 당시의 흑인 인종학살을 상세히 기록한 유일한 증언집이다.
그는 1921년 털사 인종대학살 사건 생존자 중 최고령자일 뿐 아니라 오클라호마주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유권자 중 한 명으로 2024년 대선에서 민주당 해리스 후보에게 투표했다.
그는 당시 110세로 손자 아이크 하워드, 트레이시 플레먼스와 함께 털사투표소에서 투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