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창동 감독이 24년 만에 다시 베네치아국제영화제 은사자상을 품에 안았다.
신작 ‘가능한 사랑’이 제83회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은사자상 심사위원대상(Grand Jury Prize)을 받으면서다.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에는 닿지 못했지만, 영화제 기간 내내 유력한 황금사자상 후보로 거론됐던 ‘가능한 사랑’은 결국 최고상 바로 다음에 해당하는 심사위원대상을 받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이번 수상은 이창동 감독에게도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는 2002년 ‘오아시스’로 베네치아영화제 감독상인 은사자상을 받은 데 이어 24년 만에 다시 같은 이름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2002년의 은사자가 감독 개인에게 주어진 연출상이었다면, 이번 은사자는 작품 전체에 주어지는 심사위원대상이다.
두 번의 은사자 사이에는 24년이라는 시간이 놓여 있지만, 이창동 감독의 영화가 던져온 질문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의 영화는 늘 사회와 역사 속에서 상처받은 개인을 바라봤고, 인간의 존엄과 욕망, 죄와 용서, 계급과 폭력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이창동 감독의 이력은 한국 영화계에서도 매우 독특하다.
1954년생인 그는 대학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한 뒤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영화감독을 꿈꿨던 인물이 아니었다.
교단에 서면서 틈틈이 소설을 썼고,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전리’가 당선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이후 ‘운명에 관하여’, ‘녹천에는 똥이 많다’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서 먼저 이름을 알렸다.
영화와의 인연은 그보다 훨씬 뒤에 시작됐다.
박광수 감독의 제안으로 1993년 영화 ‘그 섬에 가고 싶다’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고, 직접 조감독으로 현장을 경험했다.
이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각본 작업에도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영화의 언어를 익혔다.

감독 데뷔작은 1997년 ‘초록물고기’였다.
40대에 들어서야 처음 장편영화의 메가폰을 잡았다.
하지만 출발이 늦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초록물고기’는 도시 개발과 조직폭력 세계에 휘말리는 한 청년의 비극을 통해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무너지는 개인의 삶을 그렸다.
이창동 영화의 핵심 주제는 첫 작품부터 분명했다.
1999년에는 ‘박하사탕’을 내놓았다.
한 남자의 파괴된 삶을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며 보여주는 이 작품은 개인의 비극 뒤에 한국 현대사의 폭력과 상처가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를 보여줬다.
2002년 ‘오아시스’로 그는 세계 영화계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사회에서 밀려난 두 남녀의 사랑을 다룬 이 작품으로 베네치아영화제 감독상인 은사자상을 받았고, 문소리도 신인배우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이창동의 삶은 다시 한번 영화 밖으로 향했다.
2003년 노무현 정부에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고등학교 국어교사와 소설가, 영화감독을 거쳐 대한민국 문화정책을 책임지는 장관이 된 것이다.
약 1년4개월간 장관직을 수행한 뒤 그는 다시 영화로 돌아왔다.
2007년 ‘밀양’은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고, 주연 전도연은 이 작품으로 한국 배우 최초의 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2010년 ‘시’로는 칸영화제 각본상을 받았다.
2018년 ‘버닝’은 칸영화제에서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을 받으며 다시 한번 세계 평단의 찬사를 끌어냈다.
그리고 ‘버닝’ 이후 8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 ‘가능한 사랑’이다.
영화는 해고 노동자와 그의 아내,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려는 감독과 남편 등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두 부부의 만남을 그린다.
노동과 계급, 부부 관계, 인간의 욕망과 연민,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윤리 문제가 영화 속에서 서로 얽힌다.
이창동 감독이 지금까지 만들어온 작품 세계의 연장선에 놓인 영화다.
‘초록물고기’에서는 산업화의 그늘에 놓인 청년을, ‘박하사탕’에서는 국가와 역사가 파괴한 한 개인의 삶을 바라봤다.
‘오아시스’에서는 사회가 외면한 사람들의 사랑을 그렸고, ‘밀양’에서는 용서와 구원이라는 무거운 질문을 던졌다.
‘시’에서는 인간의 죄와 아름다움이 공존할 수 있는지를 물었고, ‘버닝’에서는 계급적 불안과 분노를 모호한 긴장 속에 남겨뒀다.
‘가능한 사랑’에서도 그의 시선은 다시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향한다.
이번 베네치아영화제에서 이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화제 기간 현지 언론과 주요 해외 매체들은 ‘가능한 사랑’을 황금사자상 유력 후보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외신들은 특히 이 작품이 노동의 상처와 계급적 긴장, 인간 존엄의 문제를 깊은 휴머니즘 속에서 풀어냈다고 평가했다.
결국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은 다른 작품에 돌아갔지만 심사위원단은 ‘가능한 사랑’에 은사자상 심사위원대상을 안겼다.
이창동 감독은 2002년 ‘오아시스’ 이후 24년 만에 다시 베네치아 무대에서 은사자 트로피를 들었다.
그 사이 한국 영화는 세계 영화계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이동했다.
이창동 역시 국어교사 출신의 늦깎이 감독에서 세계 주요 영화제가 신작을 기다리는 거장이 됐다.
하지만 그의 영화가 바라보는 곳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 역사와 제도에 상처받은 사람, 다른 이의 눈에는 쉽게 보이지 않는 인간의 고통이다.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던 교사는 소설가가 됐고, 소설가는 영화 현장의 조감독이 됐다.
그리고 40대가 돼서야 감독이 됐다.
문화부 장관을 거쳐 다시 영화로 돌아온 그는 이제 세계 영화계가 인정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거장으로 자리 잡았다.
72세가 된 2026년, 이창동은 다시 베네치아 무대에서 은사자를 들어 올렸다.
‘가능한 사랑’의 수상은 단순히 한 편의 영화가 받은 상만은 아니다.
국어교사에서 소설가로, 소설가에서 영화감독으로 이어진 40여 년의 창작 여정과, 그 시간 동안 인간과 사회를 끊임없이 바라봐온 한 예술가에게 돌아온 또 하나의 응답이다.
<K-News LA 편집부>editor@knewsl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