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서 언론 및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 주목을 받고 있는 ‘뉴욕 타임스 대 새러 페일린’의 명예훼손 소송이 일단 기각됐다.
14일 뉴욕 남부 연방지법의 제드 락코프 판사는 2008년 대선 때 공화당 부통령 런닝메이트였던 페일린 전 알래스카 주지사가 뉴욕 타임스를 상대로 낸 중상비방의 명예훼손 소송이 요건 미달이라며 심리 거부했다.
그런데 이 재판은 이미 지난주 초에 시작돼 양측의 주장이 팽팽히 맞선 뒤 지난 11일부터 배심원 숙의에 들어간 상태였다. 그럼에도 오랜 경력의 락코프 판사는 “배심원 평결 도달 후에 평결내용과 상관없이 기각할 방침이었다”면서 이같이 발표했다.
배심원 숙의를 진행한 것은 자신이 기각하면 어차피 원고 측이 항소할 것인 만큼 항소심에 도움을 주고 다시 처음부터 하는 재심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고 설명했다. 이로 미뤄 이 재판은 최종심까지 전례가 드문 여러 고비를 맞을 것을 예측된다.
이번 뉴욕 타임스와 새러 페일린의 소송은 ‘공인에 관한 기사를 쓸 때 언론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되어야 하느냐’에 대한 문제로 언론 개혁 논의가 진행중인 한국도 눈여겨 볼 가치가 있다.
언론이 특정인에 대한 ‘잘못된’ 기사를 낼 때 특정인은 언론을 상대로 명예훼손의 형사 및 민사 소송을 낼 수 있다. 형사재판도 중요하지만 징벌적 손해배상이 엄중한 미국서 민사 소송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언론사는 잘못하면 단 한 건으로 회사 문을 닫을 수도 있는 것이다.
58년 전에 바로 뉴욕 타임스가 이런 위기에 몰렸는데 “특정인이 공인(public figure)일 경우 명예훼손의 하한선은 매우 높아야 한다”는 판결을 연방 대법원으로부터 끌어내 뉴욕 타임스도 살고 이후 수많은 미 언론사가 공인 관련 기사에서 큰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1964년 당시 뉴욕 타임스는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위한 모금 격려 광고를 냈다. 광고를 보고 킹 목사와 대적하고 있던 설리번이라는 성의 앨라배마주의 고위 관리가 광고 문맥이 자신의 이름은 거명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비방중상해서 명예를 훼손했다고 주장하고 소를 제기했다. 그래서 뉴욕 타임스(주) 대 설리번 소송으로 불린다.
연방 대법원은 판결에서 “공인일 경우 언론사와 기자가 ‘실제적인 악의’를 가지고 사실과 다른 내용을 기사화했을 경우만 명예훼손에 해당된다”고 명시했다. 사실과 다른 내용이 기사로 나갔더라도 실제적인 악의가 증명되지 않으면 법적으로 문제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2008년 대선 때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가 선택한 새러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는 유세 때 머리 속에 든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거의 만천하에 드러나 매케인에게 큰 실점 요인이 되었지만 이후 상당히 인기있는 강경 우익 정치가로 자리잡았다.
문제의 뉴욕 타임스 기사는 2017년 6월의 사설로 미 하원의원 야구동호회가 운동 중 총기테러 공격을 받아 공화당 원내총무가 크게 다치는 사건 직후에 나온 것이었다. 타임스는 사설서 정치의 테러화 문제를 거론하면서 ‘이전 2011년 하원의원 총기공격 테러 때 새러 페일린의 정치자금 모금회가 타깃 민주당 의원의 ‘좌표’를 찍어줬다”고 썼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독자 제보로 밝혀져 사설은 몇 시간 뒤 즉시 이 부분을 삭제하고 이를 정정보도했다. 페일린은 타임스의 즉각적 사과와 정정보도에도 불구하고 명예훼손 소를 냈다. 논설위원과 신문사가 실제적인 악의를 가지고 잠간이지만 자신에 관해 사실이 아닌 말을 했다는 것이다.
이 소송을 기각한 락코프 판사는 ‘실제적인 악의’는 “거짓인 줄 익히 알면서, 혹은 무모하게 진실과 사실성을 무시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원고 측이 이에 관한 ‘분명하고 설득력있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1심은 이렇게 묘한 방식의 기각으로 끝났지만 항소심과 최종심이 64년 전의 ‘실제적 악의’ 조건을 그대로 수용할지 예단할 수 없다. 미 보수파들은 이 기회에 언론이 향유하고 있는 공인에 대한 특별한 명예훼손 요건을 약화시키려고 벼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