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은 세계 최고·최대 시상식이라는 명성에 걸맞는 크기와 화려함, 품격을 보여줬다. 세계 최고 배우들이 한 데 모여 수상자와 수상작에 힘껏 축하를 보내는 모습, 오스카를 거머쥔 이들이 보여준 웃음과 눈물은 감동적이었다. 각종 공연과 기념 이벤트도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폭행 사태가 발생하는 추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올해 아카데미는 정말 모든 걸 다 보여줬다. ‘지상 최대 쇼’라는 말에 걸맞는 3시간30분이었다.
◆오스카, 양손을 흔들다
올해 행사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작품상을 받은 영화 ‘코다’였다. 참석자들은 ‘코다’의 배우 트로이 코처가 남우조연상을, ‘코다’의 션 헤이더 감독이 각색상을, ‘코다’가 작품상을 받을 때마다 양손을 어깨 위로 올려 흔들며 수어(手語)로 축하를 건넸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윤여정이 진행한 남우조연상 시상이었다. 윤여정은 목소리로 코처를 호명하기 전에 수어로 코처의 이름을 부르는 배려를 보여줬다. 또 코처가 무대 위에 오른 뒤 수어로 수상 소감을 말하기 위해 양손이 다 필요하다는 걸 알고는 먼저 손을 내밀어 오스카 트로피를 받아주는 모습도 보였다. 윤여정은 코처가 수상 소감을 말하는 동안 트로피를 꼭 쥐고 그의 발언을 들었고, 이후 수 차례 수어로 그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최악의 폭력 사태…사과와 눈물
큰 문제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시상식은 윌 스미스가 망쳤다. 스미스는 시상자로 등장한 코미디언 크리스 록이 그의 아내 제이다 핑킷 스미스의 삭발한 헤어스타일을 보고 영화 ‘지. 아이. 제인’의 주인공 같다고 하자 격분해 무대 위로 올라가 “내 아내를 건드리지 말라”며 록의 얼굴을 때렸다. 스미스의 돌발 행동에 참석자들은 실제 상황인지 연출된 것인지 파악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이후 스미스는 남우주연상 수상 소감을 말하며 “좋은 날 이런 모습을 보여 동료 배우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눈물을 보였다. 그는 “‘킹 리차드’에서 어떻게든 가족을 보호하려고 애쓰는 가장을 연기했던 게 아직 남아있었던 것 같다”고 변명을 하기도 했다. 이에 아카데미는 “어떤 폭력도 용납되지 않는다”고 말했으나 록은 스미스를 경찰에 신고하지는 않기로 했다.
◆비욘세와 빌리 아일리시 등판
올해 시상식은 지난해 행사가 코로나 사태 여파로 최소 규모로 열렸던 걸 위로하기라도 하듯 여느 때보다 풍성하게 채워졌다. 우선 최근 수년 간 없던 진행자가 다시 등장했다. 배우이자 코미디언인 아미 슈머, 완다 사이크스, 레지나 홀은 번갈아가며 등장해 시종일관 유머를 던지며 참석자와 시청자를 웃겼다. 이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언급하기도 하고,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을 둘러싼 논란들, 참석자를 둘러싼 각종 가십을 언급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지난해 잠시 사라졌다가 부활한 건 역시 공연이었다. 우선 오프닝 무대는 비욘세가 맞았다. 비욘세는 올해 시상식 작품상·남우주연상 부문 등에 이름을 올린 영화 ‘킹 리차드’의 주제곡 ‘비 얼라이브'(Be Alive)를 불렀다. 비욘세는 테니스공을 연상케하는 형광색 옷을 입고 특유의 퍼포먼스와 함께 폭발적인 가창력을 선보였다. 빌리 아일리시도 무대에 올랐다. 아일리시는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주제곡 ‘노 타임 투 다이'(No Time To Die)를 선보였다. 특유의 화려한 색의 헤어스타일 대신 검정으로 염색하고 나타난 아일리시는 주제가상 부문에서 오스카를 거머쥐기도 했다.
이와 함께 돌비 극장엔 ‘엔칸토’의 OST 중 하나인 ‘위 돈 토크 어바웃 브루노'(We Don’t Talk About Bruno)가 울려퍼지기도 했다. 이 노래는 애니메이션 영화 ‘엔칸토’의 수록곡 중 하나인데, ‘돈 토크 어바웃 브루노’가 반복되는 특유의 중독성으로 빌보드 핫100 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코로나 검사 위해 백스테이지로!
올해 행사는 음향·시각효과 등 각종 기술 부문과 단편영화·단평애니 등 비주류 부문 시상을 행사 1시간 전에 사전 녹화해 본 방송 중 내보내기로 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행사를 속도감 있게 진행하고 공연 비중을 늘리기 위한 것으로, 아카데미 측이 최근 수년 간 가파르게 떨어지고 있는 시상식 시청률을 높이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이에 진행자들이 이 부분을 지적하자 장내 조명이 반짝 거리는 등 논란을 유머로 넘기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슈머·사이크스·홀은 코로나 사태를 풍자한 유머를 선보이기도 했다. 시상 중간에 브래들리 쿠퍼, 티모시 섈러메이, 시무 리우, 제이콥 엘로디 등을 호명에 무대 위로 올린 뒤 코로나 검사를 다시 해야 한다며 백스테이지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라고 한 것이다. 이에 해당 배우들은 웃으며 무대 위에 오른 뒤 백스테이지로 들어가기도 했다.
이번 시상식에선 어느 때보다 할리우드 전설들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아카데미는 ‘007 노 타임 투 다이’로 대니얼 크레이그 ‘제임스 본드’ 시대를 끝낸 ‘007 시리즈’가 올해로 첫 영화를 선보인지 60주년을 맞자 특별 헌정 영상을 내보냈다. 이 영상엔 역대 제임스 본드의 모습과 007 영화 명장면이 담겼다.
‘대부’가 1972년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은지 50주년을 기념하는 이벤트가 열리기도 했다. 이에 ‘대부’ 시리즈를 전설로 만든 3인방인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과 함께 역대 최고 배우로 꼽히는 두 사람 로버트 드 니로와 알 파치노가 나란히 무대 위에 오르기도 했다. 코폴라 감독은 “의미 있는 행사에선 말을 짧게 하는 게 좋다”며 “이런 자리를 만들어줘 감사하다”고 말했다.
남우주연상 시상자로는 1995년에 각본상을 받은 영화 ‘펄프픽션’의 세 주역 우마 서먼, 새무엘 L 잭슨, 존 트래볼타가 등장했다. 잭슨을 가운데 둔 서먼과 트래볼타는 이 영화의 상징이 된 특유의 춤을 다시 한 번 추며 분위기를 띄웠다. 참석자들은 이 세 가지 행사가 진행될 때마다 기립해서 박수를 치며 전설들을 향해 환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