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빰빰빰 빰~빠~빰~빰~”으로 시작하는 시그널. 그리고 ‘딩동댕’이라는 경쾌한 실로폰 소리가 겹쳐진다. 이어 “전국~ 노래자랑!”이라는 구수한 외침까지.
대중문화의 산 증인이었던 ‘원조 국민 MC’인 송해(송복희)가 95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영원한 현역’으로 통하며 국민 모두가 백수(白壽)를 누리기를 바라던 고인은 8일 오전 서울 강남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송해는 지난 1월에 병원에 입원했다 퇴원했고 지난 3월엔 코로나19에 확진됐다. 최근에도 병원에서 검진을 받았다. 코로나19 기간 스튜디오 녹화를 이어오던 ‘전국노래자랑’이 2년 만인 지난 4일 야외 녹화를 진행했으나 참석하지 못했다.
지난달 영국 기네스 ‘최고령 TV 음악 경연 프로그램 진행자'(Oldest TV music talent show host)로 등재됐다.
지난 34년 간 일요일 낮이면 전국의 남녀노소 누구나 이 신호에 홀린 듯 TV 앞에 앉았다. KBS 1TV ‘전국노래자랑’을 통해 국민 MC로 등극한 송해(95·송복희)의 마력이다.
‘현역 최고령 MC’로 통한 송해가 8일 눈을 감았다. 악극단 출신의 고인은 라디오·TV를 거친 국내 희극인 1세대다. 특히 ‘전국노래자랑’을 통해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지역 갈등은 물론 고부를 포함한 가족 갈등 심지어 남북 갈등까지 해결사 역할을 했다.
고인은 1927년 4월27일 연백 평야가 있는 황해도 재령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숙박업체 운영 등 상업에 종사했고, 이사를 자주 다닌 것으로 알려졌다. 송해는 해주예술학교에서 성악을 배운 예술계 지망생이었다.
광복과 함께 남북으로 분단된 이후 그는 스물세살이던 1951년 한국전쟁 1·4후퇴 때 혈혈단신 피란 내려왔다. 송해의 본명은 송복희(宋福熙). 피란 도중 바닷물로 밥을 지어 먹은 뒤 ‘바다 해(海)’를 사용해 이름을 다시 지었다.
인천항에 내린 직후 군에 바로 입대했다. 생계 해결을 위해서였다. 통신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뒤 통신병으로 복무했다. 1953년 모스 부호를 통해 휴전협정 전보을 전군에 알린 군인들 중 한명이었다. 그는 3년8개월 동안 군에 복무한 뒤 1954년 8월 전역했다.
◆1955년 창공악극단서 데뷔…라디오·TV 누비며 코미디언으로 인기
1955년 ‘창공악극단’에서 데뷔했다. 이후 유랑극단 단원처럼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버라이어티쇼 같은 공개 무대에서 사회를 보고 노래를 부르며 MC로서 경험을 쌓았다.
1960년대 초반부터 대중문화 흐름이 극장에서 라디오·TV 등 매체로 옮겨지자 그 역시 발걸음을 방송계로 옮겼다. 동아방송, MBC 등에서 본격적으로 방송활동을 했다.
1960년대 동아방송에서 ‘스무고개’와 ‘나는 모범운전사’에 출연했다. 특히 ‘스무고개’에선 코미디언 박시명(1924~1986)과 콤비로 유명했다. 두 사람은 퀴즈쇼, 막간 콩트로 인기를 누렸다.
1960년대 중반에는 박시명 그리고 구봉서·배삼룡 등과 함께 MBC와 전속 계약을 체결했다. 당시 매달 약 2만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당시로선 파격 대우였다. ‘웃으면 복이와요’ 등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박시명, 구봉서, 배삼룡 등과 함께 활약하며 TV 코미디 프로그램 전성기의 초석을 닦았다.
1974년부터 약 17년간 진행했던 KBS 라디오 교통 프로그램 ‘가로수를 누비며’도 고인의 대표작이다. ‘나는 모범운전사’ 때부터 교통방송에 특화된 입담을 과시한 송해는 ‘가로수를 누비며’에서 운전자들의 애환에 공감하며 ‘송 기사’로 통했다. 하지만 1986년 오토바이를 타다 뺑소니 사고로 아들 고(故) 송창진 씨를 먼저 떠나 보낸 뒤 방송 활동을 중단했다.
◆환갑 넘어 인생의 대표작 ‘전국노래자랑’을 만나다
고인의 상징과도 같은 ‘전국노래자랑’은 1988년 5월 경북 성주 편부터 자리를 지켰다. 환갑이 넘어 시작한 이 프로그램이 송해의 대표작이 됐다.
‘전국노래자랑’은 1980년 11월 처음 전파를 탔다. 송해가 이 프로그램의 마이크를 넘겨 받은 건 환갑이 넘은 61세였다. 교통사고로 스무살 아들을 잃고 여전히 실의에 빠져 있었던 때다. ‘국민 배우’ 안성기의 친형인 안인기 KBS PD가 송해를 설득해 공개무대 현장으로 그를 다시 끌어들였다.
송해는 몸이 좋지 않아 병원신세를 졌던 1991년 6개월 휴식을 취한 시기와 말년을 제외하곤 ‘전국노래자랑’ 녹화에 불참한 적이 없다. 34년간 공개 녹화를 통해 무려 1000만 명 넘는 사람을 만났다. ‘일요일의 남자’라는 수식어를 얻고 국민 MC로 인정 받았다. 특히 90대에도 여전히 오빠라 불리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연예인었다.
작은 시(市)가 광역시에 편입되는 과정 등을 지켜보며 전국 구석구석을 누볐다. 특히 송해는 ‘전국노래자랑’ 녹화 하루 전에는 해당 지역의 주변를 꼼꼼히 취재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지역 주민들과 ‘밀착 소통’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근심, 걱정 그리고 시름을 덜어줬다. 송해는 생전 인터뷰에서 “목욕탕에 가면 별의별 얘기가 다 나와”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송해는 지난달 영국 기네스 ‘최고령 TV 음악 경연 프로그램 진행자'(Oldest TV music talent show host)로 등재됐다.
송해는 방송인으로서 프로 의식과 성실함도 대단했지만, 체력 관리에도 항상 신경 썼다. 이른바 ‘BMW’, 즉 버스(Bus)·지하철(Metro)·걷기(Walk) 등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하며 체력을 다졌다. 80대에도 장정들과 술 대결에서 이겼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하지만 올해 들어 건강이 좋지 않아졌다. 1월에 병원에 입원했다 퇴원했고, 3월엔 코로나19에 확진됐다. 최근에도 병원에서 검진을 받았다. 코로나19 기간 스튜디오 녹화를 이어오던 ‘전국노래자랑’이 2년 만인 지난 4일 야외 녹화를 진행했으나 참석하지 못했다. 최근에 건강상의 이유로 ‘전국노래자랑’에 하차 의사를 밝혔다.
또 악극단 출신인 고인은 앨범을 여러 장 낸 가수이기도 하다. 1987년 ‘백마야 우지 마라’ 등 우리 옛날 가요를 모은 ‘송해 옛노래 1집’이라는 제목으로 첫 앨범을 발매했다. 2003년부터 2006년까지는 ‘애창가요 모음집 송해송’이라는 타이틀로 연작 음반을 냈다.
여든이 넘은 2011년부터 2013년까지엔 ‘나팔꽃 인생 60년- 송해 빅쇼’라는 전국 투어 공연도 진행했다. 2년간 18개 지역에서 40회의 공연을 펼쳤는데 매진 사례를 기록했다. 2015년엔 신곡인 8집 싱글 ‘유랑 청춘’을 발표했다.
이밖에 드라마 ‘싱글네 벙글네'(1981) KBS 2TV ‘나를 돌아봐’ MBC TV ‘세모방 : 세상의 모든 방송’ TV조선 ‘부캐전성시대’ 등 다양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지난해엔 고인의 일대기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송해 1927’가 개봉했다. 이 영화엔 세상을 먼저 떠난 송창진 관련 사연도 담겼다.
국민 MC들의 국민 MC로 통했다. 유재석, 강호동 같은 후배들이 송해를 롤모델로 꼽았다. 송해는 생전 이를 “가장 보람찬 일”로 꼽았다.
송해의 마지막 소원은 고향인 황해도 재령에서 ‘전국노래자랑’을 여는 것이었다. 2003년 8월에 꿈의 근처에 가긴 했다. ‘전국노래자랑’ 광복절 특집으로 평양 모란봉 공원 야외무대에서 북한 진행자 전성희와 공동 사회를 본 것이다. 하지만 결국 고향에서 ‘전국노래자랑’이 열리는 걸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국내 굵직한 연예 관련 상과 훈장을 다수 받았다. 대한민국연예예술상 특별공로상, KBS 연예대상 공로상, 백상예술대상 공로상, 한국방송대상 공로상, 대중문화예술상 등을 수상했고 보관문화훈장·은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