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군이 점령한 우크라이나 남부 자포리자 원자력발전소를 둘러싼 포격이 잇따르면서 방사능 유출 위험에 주민들의 탈출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고 28일 뉴욕타임스(NYT)가 보도했다.
NYT에 따르면 남부 자포리자 원전 외곽의 우크라이나 통제 검문소에는 도시를 탈출하기 위한 주민들을 태운 수십 대의 승합차와 버스 행렬이 이어졌다. 러시아 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군과 경찰이 해당 차량을 호위했다.
원전 단지 바로 옆 에네로호다르시에 거주 중이던 올레나 본드루크(46)는 남편과 함께 탈출하기 위한 차량을 구하는 데 2개월 가량이 걸렸다. 자포리자 탈출을 위해 당국에 신청 서류를 접수시키고 승인을 받았다.
안나 오버코(18)는 친구 예바 부루키나(15)와 함께 탈출을 결정했다. 할머니 부루키나는 손주와 친구를 인솔했다. 외곽 검문소 인근 안전지대에 이르러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한다.
오버코는 “포격이 너무 심해 잠을 자기가 너무 힘들다. 지난주 발전소 단전 사태 때 매우 무서웠다”고 토로했다. 딸과 함께 탈출을 시도한 발렌티나 벨리코(39)는 “내 딸이 러시아어가 아닌 우크라이나어로 교육받기를 원해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탈출민 중 일부는 자포리자가 아닌 러시아 점령지 남부 헤르손과 인근 멜리토폴을 떠나온 사람들이었다. 짧게는 자포리자에서 50㎞, 길게는 160㎞ 떨어진 곳으로부터 러시아 통제를 피해 피란길에 올랐다.
헤르손을 떠나 자포리자 외곽 검문소에 도착한 스베틀라나(66)는 “우리는 6개월째 탈출을 시도했었다. 검문소에 도착하는 데에만 이틀 반나절이 걸렸다”면서 “(탈출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러시아가 점령한 자포리자의 에네르호다르 시에는 원자로 6기를 보유한 유럽 최대 원전 에네르고아톰이 있다. 러시아 군은 개전 초인 3월 해당 원전을 장악했다. 최근 잇딴 원전 단지 주변 포격에 방사능 유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원전 포격의 책임이 서로에 있다고 공방을 벌이고 있다. 지난 25일에는 인근 발전소에 화재가 발생, 원전으로 공급되는 전력망이 일시적으로 차단돼 원자로 멜트다운 위기 상황을 맞기도 했다.
원전에 전력공급이 90분 이상 차단될 경우 핵분열로 가동되는 원자로 냉각시스템이 마비된다. 이는 원자로 노심용융(爐心鎔融·멜트다운)의 최악의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도 쓰나미로 인한 정전으로 냉각수 유입이 중단, 핵연료봉이 녹아내리면서 발생했다.
우크라이나는 자포리자 원전의 통제권을 쥐고 있는 러시아가 원전 생산 전력을 크름반도 등 러시아 점령지역으로 끌어쓰기 위해 전력망을 교체하는 과정에서 위험 상황을 조장하고 있다는 의심을 하고 있다.
앞서 방사능 유출 공포에 원전 가동을 담당하는 직원들의 탈출 행렬도 이어진 바 있다.
CNN에 따르면 러시아 침공 전인 올해 초 1만여 명에 달했던 원전 근무자는 현재 10~15% 가량만 남았다. 이 때문에 정상적인 원전 운영의 어려움에 대한 우려도 나오는 상황이다.
이처럼 방사능 유출 위험이 높아지면서 우크라이나 당국은 원전 단지 주변 56㎞ 내에 거주하는 주민 40만 명에게 방사능 피폭 예방책으로 아이오딘(요오드 알약)을 배포하기 시작했다고 NYT는 보도했다.
탈출을 택한 드미트로 오를로우 전 에네르호다르 시장은 전날 자포리자 주민들에게 아이오딘 2만5000정을 배포했다고 밝힌 바 있다. 우크라이나 보건 당국은 주민들에게 아이오딘 1알씩을 지속적으로 배포하다는 방침이다.
방사능 유출 시에는 원전에서 세슘·스트론튬 등의 방사능 물질이 방출된다. 이들 방사능 물질은 인체의 갑상선에 축적된다. 방사능 피폭 전에 요오드화칼륨(KI)으로 구성된 알약을 복용하면 세슘 등 방사성 물질의 체내 축적을 예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