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를 강타한 지진 피해 현장을 살펴보기 위해 지난 9일(현지시간) 이스탄불로 향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지진으로 교통이 마비되면서 현장으로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환승하기 위해 꼬박 6시간 기다려 도착한 아다나 공항. 도시를 떠나려는 이재민이 몰리면서 공항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지진 피해 현장은 폐허 그 자체였다. 아다나, 이스켄데룬, 가지안테프, 카라만마라슈 등 어느 도시를 가도 곳곳에서 피해 현장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아파트 한 동이 통째로 주저 앉았고, 건물들은 누가 주먹으로 친 것처럼 으스러져 있었다. 제대로 서 있는 건물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널려 있는 생수병, 가구, 가전, 가족 사진 등으로 이곳이 원래 주거지였다는 것을 겨우 가늠할 수 있었다.
거리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는 이재민들로 넘쳐났다. 정부에서 제공하는 임시 시설도 인산인해였다. 차박을 하거나 노숙을 하는 이재민도 많았다.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은 깊은 슬픔에 젖어 있었다. 유가족과 마주할 때 마다 기자도 같이 눈물을 흘렸다.
한국 해외긴급구호대(KDRT)가 구조활동을 했던 안타키아 현장은 눈을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했다. 지진으로 무너져 내린 건물들이 도로를 뒤덮었다. 잔해와 먼지, 쓰레기가 뒤섞이면서 발걸음을 떼는 것도 어려웠다. 한 켠에는 담요를 덮은 시신들을 볼 수 있었다.
한 구조대원은 기자에게 “여러 해외 재난 현장을 다녀왔지만 이번 지진이 가장 열악한 현장인 것 같다”며 안타키아 상황의 심각성을 전했다.
현장에서 구호대를 찾으려면 위도와 경도가 적힌 좌표를 봐야 했다. 통신 자체가 두절되면서 스마트폰 지도로 구호대를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멀리서 육안으로 익숙한 특전사 유니폼이나 소방관 유니폼을 보고 나서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구호대와 만나도 연이은 구조 요청에 이리 저리 흩어지는 상황이 반복됐다. 이재민들은 “소리가 들린다”, “저 아래 가족이 묻혀 있다”며 우리 구호대를 애타게 찾았다. 오인 신고가 대부분이지만 구조대는 실낱같은 가능성을 염두해 일일이 확인에 나섰다.
구조견은 날카로운 철근과 잔해물 사이를 오가며 부상을 당해 붕대를 감고 구조 활동을 이어가야 했다. 구조견의 붕대 투혼은 현지 언론도 관심을 보였다.
우리 구호대는 8명의 생존자를 구조하고, 19구의 시신을 수습했다. 골든 타임이 넘어선 이후에도 생존자를 구조해내면서 인근 주민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 한 주민은 구호대 텐트에 “고마워 형”이라고 감사의 인사를 전해 화제가 됐다.
현지 생활은 쉽지 않았다. 통신 상태가 좋지 않아서 한국으로 연락이 제대로 닿지 않았다. 기사를 쓰고도 송고를 하지 못해 통신이 되는 곳까지 이동해야 했다.
지진 때문에 호텔은 영업을 중단했고 식당은 문을 닫았다. 매 끼니 챙겨 먹는 것은 상상할 수 조차 없었다. 하루 종일 굶는 날도 있었고, 하루 한 끼 식사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호텔을 구하지 못하는 날은 차박을 했다. 그나마 기름을 구하기 어려워 시동을 끄고 잠에 들었다. 추위에 떨면서 자고 일어나 현장으로 달려갔다.
피해 현장에 다니면서 온 몸에 먼지를 뒤집어 썼지만 제대로 씻지도 못했다. 어느 날은 물티슈로 얼굴을 닦았는데, 시커먼 먼지가 그대로 묻어나왔다. 옷을 갈아 입지 못해 몸에서는 냄새가 났다. 한국에서 누리던 일상은 여기에서는 사치였다.
여진이 찾아올 가능성이 높아 미세한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호텔에서 자다가 새벽에 큰 소리가 들려 일어나 로비로 급하게 내려와 상황을 살핀 날도 있었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현지 상황을 글로 표현하는 일이었다. 그들의 아픔을 전할 수 있는 표현을 고민 하느라 밤을 새기도 했다.
현지 참상을 온전히 마주하는 것. 기자에게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자체가 큰 고통으로 다가왔다.
열악한 현지 상황에도 힘을 낼 수 있었던 이유는 튀르키예 사람들의 배려 덕분이다. 어느 도시를 가도 튀르키예 사람들은 우리를 환대했다.
특히 한국에서 온 취재진이라는 사실을 신기해했다. 형제의 나라라고 친밀감을 표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코레(한국)’ 한 마디에 대화가 쉽게 진행됐다.
먼저 말을 걸면서 친근감을 표시하는 사람이 많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눈이 마주치면 엄지를 치켜 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같이 사진을 찍자는 요청도 끊이지 않았다. 아이들은 해맑게 웃으며 우리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들은 우리가 밥은 먹고 다니는 지, 잠은 어디서 자는 지를 궁금해했다. 늘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조용히 물과 식사를 들고 찾아와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해야 했다.
한국에 피스타치오를 수출하는 회사 임원이라고 소개한 한 남성은 우리 몰래 식당에서 밥값을 계산했다.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샤워실을 내주고, 잠자리를 제공한 분도 있었다. 이들 모두 “튀르키예를 도와주러 와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보내준 환대와 친절을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그들이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