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은 문화적 개념이다. 조선시대의 양반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양반’이 객관적인 기준에 의거해 규정되는 법적 개념이 아니라 오랜 시간 공동체에서 형성되어 정착된 문화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양반 계층은 중세 유럽이나 일본 도쿠가와 시대의 특권층과 달리 법규에 의해 정의되는 신분계층이 아니었다.
누가 양반이고 누가 양반이 아닌가는 문화적 규칙에 근거하여 여러 세대에 걸쳐 이루어지는 사회적 공인과 평판에 달려 있었다.
원래 양반은 유교적 관료체제에서 문관(‘문반’)과 무관(‘무반’)을 합쳐서 가리키는 용어였다.
조선 정부는 건국 초기부터 시험을 통해 관료 후보자를 선발하는 과거제도를 강화하였다. 고위 관직자나 공신의 친척이나 자제를 문무관에 기용하는 음서제를 제한했고, 능력있는 사람은 신분 상의 하자가 없는 한 누구나 시험을 통해 관직자가 될 수 있도록 하였다.
양반 만이 과거시험을 볼 수 있다는 자격 제한도 없었다.
즉 일반 상민이 양반으로 계층상승하는 데 있어 법적 장애물이 거의 없었다. 이는 누구나 유학을 공부하여 도를 닦고 덕을 쌓으면 ‘군자’가 될 수 있으며 ‘군자’가 관직자가 되어 백성에게 인간의 도리와 예를 가르치는 게 통치의 중요한 목적이라는 신유학(성리학)의 기본 철학때문이었다.
유교국가였던 조선의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는 행정보다 교화를 중시했고 문무관료는 유능한 행정가보다 백성들을 가르치는 교사이고자 하였다. ‘양반’은 바로 백성의 스승인 ‘군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흔히 양반은 3대 혹은 4대 이내의 조상 중에 문과급제자가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이러한 법적 규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중앙정부가 행정편의를 위해 네 분의 조상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중에 문과급제자가 없으면 군역을 부과한다는 정책을 시도하기는 했으나 여론의 지지가 없어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성호 이익(1681-1763)은 성호사설에서 당시의 여론을 잘 대변한다.
“문벌세족의 경우 여러 대 동안 벼슬을 하지 않았다고 하여 어찌 그것을 이유로 하여 그들을 졸지에 군에 편입시켜 미천한 백성들과 동일하게 다룰 수 있겠는가”(송준호 조선사회사연구141쪽에서 재인용)
이익이 말한 ‘문벌세족’은 선대 조상들이 높은 관직에 올랐거나 학문과 덕행으로 유명한 가문을 말한다. 그 조상들은 백성들을 가르치는 스승이요 지도자로 인정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훌륭한’ 조상들의 자손은 비록 관직자가 아니어도 일반 상민과 똑같이 취급하여 군역을 부과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성호 이익의 생각이요 당대의 여론이었다.
누구나 유학을 공부하고 자기 수양을 함으로써 군자가 될 수 있다는 성리학적 통치이념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 문무관을 지칭하던 양반의 지위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는 거의 세습적인 지위가 된다. 족보와 고문서, 그리고 현지조사를 활용한 역사적, 인류학적 양반 연구들은 지역사회의 유학자들이 보학적 관점에서 양반을 품정하였음을 많은 사례들을 통하여 보여준다.
누가 양반인지 논함에 있어 그 기준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이긴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요건은 현조의 존재 여부였다. ‘현조’는 높은 관직에 올랐거나 학문과 덕행으로 가문을 세상에 널리 알린 뛰어난 조상을 말한다. 씨족(본관이 같은 성씨)의 시조나 중시조처럼 계보관계를 정확히 추적할 수 없는 아득히 먼 조상은 현조로 간주되지 않았다. ‘안동 김씨’, ‘전주 이씨’처럼 본관이 같은 성씨는 구성인원이 양반, 중인, 천민을 다 포함하여 계층적으로 다양했고 전국적으로 분산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양반 가문들이 내세우는 현조는 대부분 부계친족집단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16세기, 17세기에 활약했던 유명한 유학자들이나 관직자들이다. 이들의 후손들은 다른 방계친척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분하기 시작했고 일정한 지역에 세거하면서 ‘아무개 자손’이라는 부계친족집단을 형성하였다.
이 부계친족집단에 속하지 않으면, 즉 ‘아무개 자손’이 아니면 유림사회에서 양반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들은 시조와의 계보관계가 확실한 친족집단이며 ‘파’ 혹은 ‘문중’, ‘종중’으로 불렸다. 그리고 파의 시조가 얼마나 유명했는가에 따라 그 파에 속한 후손들의 양반의 급수가 정해졌다. 가령 ‘우암 자손’의 파시조는 문묘에 배향된 유학자이자 노론의 거두였던 우암 송시열(1607-1689)인데 ‘우암 자손’은 조선의 일급 양반으로 대우받았다.
또한 파시조의 후손들 중에 뛰어난 인물이 나타나면 그를 중심으로 ‘파’는 하위 지파로 분파된다. 뛰어난 인물이 많이 배출될수록 ‘파’는 지체높은 양반 가문으로 지역 유림에서 인정받았다.
후세에 올수록 유명한 조상 누군가의 자손이 아니면 본인이 아무리 출중해도 양반으로 대우받지 못했다. 생원이나 문과급제자도 자신의 직계 조상 중에 내세울만한 인물이 없으면 향안과 같은 양반 유학자 모임에 참여하기 어려웠다. 가계 상의 의혹이나 하자가 있을 경우 아무리 국가에 혁혁한 공을 세워도 ‘한미한’ 가문 출신이라는 이유로 관직에 임명되지 못하기도 하였다.
현조 다음으로 중요한 양반의 조건은 자손들이 일상생활에서 ‘양반답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다.
양반답게 사는 것은 ‘봉제사접빈객’을 포함하여 유교적 학식과 예절을 갖추어 사는 것을 뜻한다.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과거급제하는 것, 관직자가 되는 것, 학문에 정진하는 것, 문집을 남기는 것, 서원을 출입하는 것, 유교적 가례를 행하고 덕행을 실천하는 것, 다른 양반 집안과 혼인관계를 맺는 것 등등을 포함한다. 예컨대 부모의 묘소에 초막을 짓고 삼년상을 치르는 것처럼 유교적 예를 실천하는 것은 지역 사회에서 지체높은 양반이라는 평판을 얻는데 아주 중요했다.
안동 지역의 양반 부계친족집단을 연구한 인류학자 송선희는 드물지만 일반 상민이 여러 세대에 걸쳐 유학을 공부하고 예를 실천하는 생활을 함으로써 지역사회에서 양반으로 인정받아 20세기 초에 양반집안과 혼인관계를 맺은 사례를 보고하고 있다 (Song 1982: 432).
반면에 아무리 훌륭한 조상의 후손이라 하더라도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양반답게 살지 못할 때 문중 전체가 폐족이 되어 그와 그의 후손들은 상민의 신분으로 전락되고 만다. 한 집안이나 가문, 혹은 종족이 양반신분을 상실할 때 국가에서 규정하는 법적인 절차나 과정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지역사회에서 다른 양반들과 교유하지 못하고 양반집안의 며느리와 사위를 얻지 못하는 사회적 고립의 과정이 진행될 뿐이었다.
요약하면 유명한 관직자나 유학자인 현조가 있고 그 후손들이 대대로 학문을 닦고 유교적 예를 지키며 살아가는 한 그 가문은 지역사회에서 양반으로 인정받았다. 군자에 의한 덕치를 지향하는 유교국가에서 ‘군자’로 존경받는 사람의 자손들이 비록 여러 세대 동안 관직에 오르지 못한다 해도 유학을 공부하고 덕행을 실천하며 사는 한 양반으로서 예우하는 것은 바로 사회의 기강을 바로 잡는 일이었다.
양반의 지위를 획득하고 유지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조상이 성취한 것에 따라 개인의 지위가 거의 결정되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본인 또한 양반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또 후대의 자손들에게 훌륭한 조상이 되기 위해, 즉 집안과 가문을 ‘빛내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조상과 가문으로부터 독립되어 있고 자유로운 개인은 조선 후기 양반 문화에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사회에서 양반으로 대우받고 그 지위를 유지하는 것은 여러 세대가 걸리는 긴 과정이었다. 상공인이나 부유한 상민이 돈을 주고 공명첩을 사거나 족보를 위조하여 갑자기 양반으로 계층상승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지역사회에서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잘살던 양반이 가난해졌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양반지위를 박탈당하고 일반 상민으로 몰락하는 일도 일어날 수 없었다.
양반이 문화적 개념이기 때문에 양반의식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일제 식민지 시기를 거쳐 서구의 근대적 법제도가 들어오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표방한 지 거의 백여년이 지났어도 사회의 지도자 계층 혹은 지배계층이 어떤 사람들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화적 인식은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관념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계속 지속될 수 있다. 그래서 현대 한국사회에는 법 위에 국민정서가 있게 된다.
사람들은 현대적 언어로 묻는다. 누가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가? 누가 나라를 이끌어가야 하는가? 그러나 질문의 내용은 선비들이 수백년 전에 했던 ‘누가 양반인가’ 하는 질문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의 조상은 누구인가? 그들의 조상은 누구인가? 나라를 팔아먹고 일제의 권력에 아부하여 부를 축적한 ‘친일파’인가? 아니면 가산을 팔아 독립운동에 몸바친 독립운동가인가? 그들은 ‘정의’를 위해 살았는가? 아니면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살아온 기득권층인가? 누가 더 도덕적으로 훌륭한가? 누가 자손 대대로 대우받아야 하는가?
(계속)
참고문헌 송준호. 1987. 조선사회사연구. 일조각,
Song, Sunhee. 1982. Kinship and lineage in Korean village society. Dissert.: Indiana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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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희 교수는 서울대 의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문화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한국학 중앙연구원 전임 연구원으로 재직하며 일제시대의 가족변화에 관한 연구프로젝트를 수행한 바 있다. 주요 논문으로 “From Gentry to the Middle Class: The Transformation of Family, Community, and Gender in Korea”(박사학위논문), 「도시 중산층의 핵가족화와 가족 내 위계관계 변형의 문화적 분석」(『한국문화인류학』, 1995), 「문화적 관념체로서의 가족: 한국 도시 중산층을 중심으로」(『한국문화인류학』, 1995), “‘Home is a Place to Rest’: Constructing the Meanings of Work, Family and Gender in the Korean Middle Class”(Korea Journal, 1998), “Mothers and Sons in Modern Korea”(Korea Journal, 2001), 「대가족 속의 아이들: 일제시대 중상류층의 아동기」(『가족과 문화』, 2007) “도시 중산층 기혼여성의 취업과 부부 역할:’자기 일’의 정치학”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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