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 개봉한 영화 ‘붉은 10월(The Hunt for Red October)’은 냉전기 시대에 소련의 최첨단 핵잠수함 선장 라미우스가 소련을 배신하고 미국으로 망명하는 스토리로 보통 스릴러가 아니라, ‘해양 패권의 이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아울러 이 잠수함 ‘붉은 10월(Red October)’은 단순한 무기를 넘어 자유를 향한 반항의 상징으로 그리면서도 현실의 핵잠수함 기술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소음하나 없이 바다를 누비며 적의 음파탐지를 속이는 혁신적 장치를 갖추고 핵잠수함의 본질인 은밀성과 생존성 그리고 파괴력을 극대화한다. 핵잠수함은 핵반응로의 에너지로 수십 년간 작동할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미국의 버지니아급 핵잠은 한 번의 급유 없이 33년간 작전이 가능하다.
한마디로 ‘바다 속의 유령’이고 이동하는 거대한 군사기지다. 해서 핵잠은 보이지 않는 제국의 파워이고, 바다는 그 힘이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무대로 늘 문명의 시험대였던 셈이다.
역사적으로 해양국가들은 바다를 먼저 품은 나라들이었다. 페니키아는 상업과 문자를, 아테네는 민주주의와 해상동맹을, 영국은 산업혁명과 제국을 모두 바다 위에서 이룩했다. 하지만 이들 해양국가들은 동시에 ‘개방에서 팽창과 과욕으로 그리고는 쇠퇴’로 이어지는 패턴을 그렸다.
반면 육상의 제국이 바다로 나아간 사례는 드물다. 명나라의 정화(鄭和)는 그 예외였다. 15세기 초, 정화는 200척이 넘는 대함대를 이끌고 인도양을 횡단했다. 그의 항로는 아프리카 해안까지 닿았으며 그 함대의 규모는 콜럼버스보다 한 세기 앞섰다. 그러나 중국은 곧 항해를 중단시켰다. ‘바다는 사치이며, 이민족의 혼탁’이라는 이유를 들어 조공체계로 세계를 닫아버리면서 바다를 버리고 육지로 돌아갔다.

오늘날 중국이 남중국해로 진출하고 항모전단을 확장하는 것은 그 오래된 기억의 부활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다는 육상제국의 행정 시스템으로는 다룰 수가 없다.
이어령 교수는 ‘육지의 문명은 머무름의 정착과 기억의 문명인 반면, 바다는 끊임없이 흘러가며 교류하고, 잊고 다시 시작하는 문명’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육지의 문명은 경계를 세워 기억을 쌓고, 바다의 문명은 경계를 지워 새 길을 만든다’고 했다.
바다가 문명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정화의 중국은 그 시험을 멈추었고, 영국은 그 시험을 통과했으나 결국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다시 새로운 문명들이 그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이 이야기는 먼 과거가 아니다. 한국이 야심차게 추진하려는 핵잠수함 개발에도 ‘붉은 10월’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한국은 1970년대 부터 반세기 넘게 해양 강국을 꿈꿔왔지만, 기술과 조약, 외교의 벽 앞에서 늘 멈췄다. 미국이 동맹국의 핵잠 개발을 꺼려왔기 때문이다.
헌데 이번에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승인한다는 언급이 나왔지만 ‘허락’이라기보다 ‘시험’에 가까워 보인다. 반도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한국은 육지와 바다의 경계 위에 선 나라다. 그만큼 해양국가로 나아갈 가능성과, 육상국가의 한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셈이다.
붉은 10월’의 선장처럼, 한국은 자유로운 항해를 꿈꾼다. 하지만 ‘붉은 10월’의 탈출처럼 한국의 핵잠의 꿈은 국제 규범의 그물을 뚫고 나가는 여정이 배신과 추격의 연속이 될 것이다. 트럼프의 승인 그 이면의 어둠이 아주 깊어 보여서다.
‘붉은 10월’의 교훈은 무엇일까? ‘붉은 10월’의 라미우스 함장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에는 대가가 있게 마련’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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