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을 해임할 경우, 인플레이션을 억제해 온 방어막이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미국은 지난 몇 년간 코로나19 팬데믹 혼란, 대규모 재정 부양,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민자 단속, 관세 등의 영향으로 인플레이션 압력에 직면해 왔다.
인플레이션을 자극하는 외부 요인들이 여전히 남아있음에도, 물가가 연준의 목표치인 2% 수준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기대가 작용한 데에는, 연준이 향후 물가 상승 압력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것이라는 시장의 신뢰가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파월 의장을 해임하고, 금리 인하에 협조적인 인물을 후임으로 임명할 경우 이러한 신뢰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20일(현지 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연준이 정치적 압박에 굴복해 경제 상황에 맞는 통화 정책을 펼치지 못한다면, 인플레이션에 대한 방어 능력은 약화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연준 차기 의장 후보로 지목되는 케빈 워시 전 연준 이사와 케빈 해싯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 모두 연준의 독립성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밝혔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파월 의장을 해임할 경우 연준의 독립성은 후임자의 입장과는 무관하게 훼손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파월 의장뿐 아니라 후임자까지도 바꿀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지난 5월 미 대법원은 연준에 대해 “독특한 역사적 전통을 가진 준민간 조직”이라며 정당한 사유 없이 파월 의장을 해임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사기 혐의가 있다면 그가 물러날 수도 있다”며 여지를 남겼다. 일각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연준 본부 건물의 개·보수 비용 문제를 들어 해임을 시도할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투자은행 파이퍼 샌들러의 애널리스트들은 보고서를 통해 “누가 후임이 되든 시장은 연준의 독립성을 의심할 것”이라며 “연준의 정치화는 매우 중대한 사안”이라고 지적했다.
연준 흔들면 인플레 방어 흔들린다… 美 통화정책 독립성 ‘위기’
WSJ에 따르면 연준에 대한 정치권의 압박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해리 S. 트루먼, 린든 B. 존슨, 리처드 닉슨, 로널드 레이건 등 전임 대통령들 역시 연준에 금리 인하를 압박했지만, 이는 대개 비공식적으로 은밀하게 이뤄졌다. 외부에서 평가하는 연준의 독립성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다.
1993년 이후로는 대통령들이 연준의 통화 정책에 공개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전통을 지켜왔다. 이러한 정치적 독립성 덕분에 연준은 금리를 자율적으로 조절하며 물가 안정이라는 목표에 집중할 수 있었고, 인플레이션도 2% 안팎에서 안정적으로 유지됐다.
그러나 2021년 팬데믹 여파로 공급망이 붕괴되고 노동시장이 혼란에 빠지자 물가가 급등했고 인플레이션은 7%를 넘겼다. 연준은 당시 상황을 과소평가했지만, 이후 급격히 금리 인상에 나섰고, 경기 침체 없이 경제를 연착륙시키는 데 성공했다.
WSJ은 “공급과 수요가 정상화되자 임금과 가격도 안정됐다”며 이를 “1993년 이후 통화 정책 체제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이는 연준의 독립성과 신뢰가 기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고, 정치로부터 독립된 통화 정책 체제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강조했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전 세계 중앙은행의 수장이 갑작스럽게 교체된 사례를 분석한 결과, 2년 후 해당 국가의 인플레이션이 1~2%p(포인트) 더 높아졌고, 경제 성장에는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미국의 금융 시스템은 연준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신뢰받는 체제로 꼽히지만, 최근 달러 약세와 금값 상승 등 일부 징후는 신뢰가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JP모건에 따르면 관세 효과가 사라진 뒤인 3~4년 후의 기대 인플레이션율은 6월 말 2.15%에서 2.36%로 상승했는데, 이는 파월 의장 해임 가능성에 대한 시장의 우려를 반영한 것이다.
WSJ은 “단기적으로는 느슨해진 노동시장 덕에 임금 상승 압력이 억제돼 인플레이션이 완화될 가능성이 크지만, 경제가 과열되고 물가 압력이 다시 커지면 연준의 독립성이 진정한 시험대에 오를 것”이라며 “브레이크가 고장났다는 사실은, 정작 멈춰야 할 순간이 되어야 알 수 있는 법”이라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