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아직 피가 끓나 봐요.”
최근 디즈니+가 공개한 드라마 ‘카지노’ 메이킹 영상 속엔 배우 최민식(61)이 배우·스태프와 함께 앞으로 연기할 액션 장면에 대해 논의 중인 모습이 나온다. 최민식은 현장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며 의견을 낸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그는 직접 시범을 보이며 목소리를 높이고 현장을 주도한다. 아직 연기가 시작되지 않았지만, 이미 그 장면에 깊숙이 몰입해 있다.
최민식은 1989년 데뷔해 34년 간 연기하며 대한민국 최고 배우가 됐다. 뜨거운 배우, 불 같은 배우가 그를 수식하는 말이다. 그리고 어느새 최민식은 환갑을 넘겼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다면, 이미 은퇴했을 나이.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타오른다. ‘카지노’를 끝낸 최민식을 만나 이 열의의 정체에 관해 물었더니 그는 쑥쓰럽다는 듯 “아직 피가 끓는다”고 말하며 웃었다.
“촬영은 시간이 제한돼 있잖아요. 아주 효율적으로 끝내야죠. 또 최대한 간결하게 핵심만 담아서 보는 사람에게 전달해야 돼요. 집중해서 찍고 연기해야죠. 그리고 만약 그게 액션이라면 누구도 다치지 않게 장면을 만들어야 하죠. 그래서 제가 좀 의견을 낸 겁니다.”
디즈니+ 오리지널 드라마 ‘카지노’는 강윤성 감독이 각본을 쓰고 연출까지 맡은 작품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최민식이 없었다면, 아마 이 드라마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최민식이라는 배우의 존재감, 그가 이 극에서 차지하는 비중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카지노’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간다는 최민식의 열정에서 시작한 드라마다. 그는 오래 전부터 한 인간의 삶을 그린 방대한 이야기, 대서사시를 해보기를 원했다. 하지만 영화계 여건상 그런 작품을 만나지는 못했다.
좋은 잠을 꺼내먹어요
기회는 우연찮게 찾아왔다. 강 감독과 함께 준비하던 영화가 외부 요인으로 인해 제작이 무산됐고, 최민식은 강 감독에게 집필 중인 다른 아이템은 없느냐고 물었다. 그때 강 감독이 최민식에게 내놓은 게 바로 ‘카지노’ 트리트먼트였다. 초고 수준의 원고였지만, 최민식은 자신이 찾던 그런 이야기가 담긴 작품이라고 판단했다.
“쭉 읽어보니까 의도가 보이더라고요. 제가 찾던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죠. 강 감독에게 힘들겠지만 한 번 해보자고 했어요. 꼼꼼하게 하나 씩 만들다 보면 좋은 작품이 나올 것 같은 거예요. 물론 쉽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긴 호흡의 작품은 정말 오랜만에 하는 거잖아요.”
최민식의 마지막 드라마는 MBC에서 1997년 8월부터 1998년 1월까지 방송한 ‘사랑과 이별’이었다. 이후 최민식은 영화만 했다. 그가 드라마로 돌아오는 데는 여러가지 요인이 겹쳤다. 코로나 사태로 극장 상황이 안 좋아졌고, 앞서 언급했듯이 대서사시를 완성해보고 싶다는 최민식의 바람도 있었다. 그는 “물리적인 힘듦은 어떤 작품을 하든 베이스로 깔고 가는 것”이라며 “한 시퀀스라도 놓치면 극 전체가 엉클어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힘들었다”고 했다.
‘카지노’는 차무식이라는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깡패 아버지의 폭력 속에서 자란 유년 시절은 불우했고, 머리는 좋았지만 이미 아웃사이더가 돼버린 학창 시절도 고달팠다. 어떻게든 대학에 갔지만, 의도치 않게 민주화 시위에 휘말리며 군에 가야 했고, 대북첩보공작부대에서 복무했다. 제대 후 영어 학원을 하다가 불법 도박장에 손을 댔고, 이후 세무 당국에 쫓겨 필리핀으로 도망쳤다가 전 재산을 도박으로 잃었다. 그리고는 다시 온갖 구질구질한 일을 해가며 특유의 수완을 발휘해 필리핀 카지노 거물이 됐다. 그리고 믿었던 동생에게 배신 당해 느닷없이 죽어버린다. 최민식은 이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산 차무식을 “평범한 남자”라고 설명했다.
“그냥 인생이 그렇게 굴러간 거예요. 사실 인생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좋을 때가 있는가 하면 어느 순간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지 않습니까. 모든 게 불확실하죠. 이 불확실성을 차무식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겁니다. 죽음이라고 다를까요. 죽음도 그렇게 느닷없이 찾아오는 거죠. 실제 삶에서 누아르 영화처럼 비장하게 죽고 그런 건 없잖아요. 만약 시청자들이 차무식의 죽음을 보고 허무함을 느끼셨다면, 그게 저희가 의도한 겁니다.”
‘카지노’는 카지노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드라마의 장르적 특성을 일부 살리면서 동시에 최민식의 말처럼 리얼리티에 초점을 맞춘다. 이를 보여주듯 최민식은 앞서 그가 다양한 작품에서 보여줬던 그 무시무시한 표정을 간혹 내보이긴 하지만 대체로 극도의 자연스러움으로 연기한다. 마치 연기를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말하자면 ‘카지노’에서 최민식을 보고 있으면 연기의 궁극은 연기와 실제를 구분할 수 없게 만드는 경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맞아요. 그렇게 연기하려고 했어요. 이 작품은 그렇게 연기하는 게 어울린다고 봤습니다. 평소에 제가 쓰던 장난스러운 말투나 행동 같은 걸 일부러 일부 넣은 거죠. 극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요. 배우는 몸이 악기입니다. 연기하는 캐릭터가 음악으로 치면 록이냐 발라드냐에 따라 이 몸뚱아리를 연주 방식이 달라지는 거예요.”
차무식은 무엇을 좇는지 알 수 없는 인간이다. 표면적으로는 돈이 목표인 것 같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벌어 들인 막대한 돈으로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 ‘카지노’엔 차무식이 호화 생활을 하는 모습이 없다. 그는 그저 돈을 쌓아 올리는 데 집착하는 것 같다. 이런 차무식에 빗대어 배우 최민식은 무엇을 좇아 연기하는 것 같냐고 물었다. 그러자 최민식은 마치 차무식 같은 답변을 내놨다. “한 작품을 완성해가는 재미에 취해서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글쎄요. 연기가 정말 나한테 뭔지 잘 모르겠어요.”
“고3 때 처음 대본 리딩한 이후에 운 좋게도 평생 이 일만 했어요. 뭐랄까, 숨 쉬는 것, 밥 먹는 것과 비슷한 일인 거죠.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연기라는 게 죽어야 끝나는 작업이잖아요. 아마 저는 연기의 의미를 끝까지 모르고 갈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