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정부 시위대와 정부의 경찰·보안군, 집단안보조약기구(CSTO)의 평화 유지군이 격돌하고 있는 카자흐스탄의 상황에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지난 2일(현지시간)부터 정부가 추진한 액화석유가스(LPG) 가격 인상으로 촉발된 이번 시위에 대해 외신들은 푸틴에 대한 위협이자, 그동안 곪은 반정부 정서가 폭발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앞서 액화석유가스(LPG) 가격 인상에 반대하며 시작된 카자흐스탄의 반정부 시위가 전국으로 급속히 확산하고 있다.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 방송을 통해 시위대를 ‘국제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규정하며 CSTO 회원국 정상들에게 평화 유지군 긴급 파병을 요청했다. 이에 6일부터 평화 유지군이 카자흐스탄의 한 공항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7일 러시아의 3개 비행장에 공수부대가 배치돼 있으며, 군 수송기에 무기와 장비를 탑재하는 등 카자흐스탄으로의 비행을 준비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반정부 시위, 푸틴에 대한 위협
카자흐스탄 반정부 시위는 옛 소련 연방의 위상과 영향력 회복을 과업으로 삼고 있는 푸틴에게 위협이라는 분석도 있다.
러시아는 주위 권위주의 정부가 붕괴되면 서구 세력이 개입할 여지가 많아져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된다. 체제 붕괴는 인근 국가로 확산될 수 있고, 이는 곧 러시아의 영향력 축소를 의미한다고 워싱턴포스트(WP)는 분석했다.
앞서 2014년 우크라이나, 2020년 벨라루스에서 벌어진 민주화 운동은 러시아에 위협이었다. 옛소련 국가에서 일어나는 민주화 운동은 러시아에게 단순한 동맹국 이탈이 아닌 국가안보 위협이다.
푸틴은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EU) 가입을 희망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군사 협력을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여 경계하고 있다. 1991년 소련 해체로 독립한 우크라이나가 친(親)서구 노선을 밟아 자국의 위성국가 되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공수부대를 파견하는 등 카자흐스탄 반정부 시위에 개입하는 것도 역내에서 영향력을 잃지 않으려는 것이다.
미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PF)는 “카자흐스탄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유럽과 중국에서 에너지 수출을 비롯한 외교 정책 관계를 구축하면서 러시아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려고 노력해왔다”고 지적했다.
이어 “러시아는 여전히 카자흐스탄의 가스를 구매해 자체적인 생산 감소에 대처하고 있으며 카자흐스탄에 있는 바이코누르 우주 기지는 러시아 우주 프로그램과 발사의 본거지다”라며 “지금 일어나고 있는 시위는 러시아의 이익에 큰 도전이다. 미국은 현재 실질적으로 개입하고 있진 않지만, 시위에 대한 미국의 단순한 구두 지지라도 있을 경우에는 카자흐스탄을 넘어 우크라이나에서의 상황도 더욱 악화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도 “카자흐스탄은 그동안 다국적 외교 정책을 추진해 왔다. 그 결과 러시아와의 긴밀한 관계는 다른 서방 국가들과의 좋은 관계로 힘을 잃어왔다”고 했다.
막심 수치코프 모스크바 국립 국제관계대학교 국제연구소장은 러시아의 카자흐스탄 개입에 대해 “러시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기회”라고 밝혔다.
Explosions and gunfire during the #KazakhstanProtests in Almaty, #Kazakhstan. Take a look.pic.twitter.com/Y8Pcp6Gres
— Steve Hanke (@steve_hanke) January 7, 2022
◆’서구 세계 vs 러시아’ 아닌 국가 내부 ‘독재 vs 국민’ 시각도
카자흐스탄을 둘러싼 서구 세계와 러시아 간의 세력 다툼이 아닌, 카자흐스탄 내부 정치·사회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는 분석도 있다.
가디언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시위대와 접촉한 뒤 “많은 시위자들이 국가의 정치 및 경제 상황에 대한 오랜 좌절의 결과로 시위를 벌이게 됐다”고 보도했다.
PF는 “전형적인 서구 대 러시아의 대결 구도가 아닌, 카자흐스탄 내부의 경제적 불안과 권력 이양에 대한 국민의 불만에 집중해야 한다”며 “(이번 시위는) 독재자들의 가장 큰 위협은 자국민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러시아 문예지 프로스터의 작가이자 편집장을 지낸 발레리 미하일로프는 “정의가 근본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교육을 못 받고 정상적인 직장도 갖지 못하며 스스로 삶을 꾸려나갈 수 없는 젊은이들 사이에 절망감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엘리트들이 부자가 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사회적 불만이 생기는 것”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전했다.
WSJ는 “카자흐스탄 정부는 천연자원의 더 나은 분배와 권위주의적 정치 체제, 부패를 해결하겠다고 거듭 약속했지만 변화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며 “서구에서 개혁의 신호로 받아들여지는 국가 자산의 민영화 약속은 매번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짚었다.
또 “급격한 연료 가격 상승으로 (시위가) 촉발됐지만, 카자흐스탄 시위는 소련 붕괴 이후 권력을 잡은 정권에 대한 전반적인 불만 속에 빠르게 확산됐다”며 “시위는 정부에 대한 불만을 허용하지 않고 경제난을 해소하지 못하는 국가의 권위주의적 정치 체제에 대한 변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WP는 “나자르바예프가 퇴임한 이후 그와 그의 가족 주변에서 상당한 부패 의혹이 제기됐다”며 “영국 정부는 그의 딸과 손자에게 어떻게 1억800만 달러(약 1300억3200만원) 상당의 런던 부동산을 구입할 수 있는지 알아내려 했지만 실패했다”고 카자흐스탄 정치권의 만연한 부패를 지적했다.
실제로 나자르바예프 전 대통령은 30년 장기집권하는 동안 매번 100% 가까운 득표율로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를 비판하는 정적이나 언론인들은 투옥됐다.
2019년 6월 취임한 토카예프 현 대통령도 시위가 통제된 상황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당선됐다. 나자르바예프는 물러났지만 그가 구축한 독재 체제는 이어지고 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한 인권 옹호 단체는 “토카예프 대통령은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전 대통령보다 부드러운 이미지를 보이려 노력했다. 하지만 전임 대통령이 구축한 독재 체제는 지금까지 건재한 것으로 입증됐다”고 지적했다.
이번 시위로 경찰은 최소 18명이 사망하고 748명이 부상당했다. 사망 경찰관 중 두 명은 목이 잘린 채 발견됐다. 시위 참여자 중 26명이 사망했고 3000명 이상이 구금됐다고 7일 러시아 타스 통신은 전했다.
토카예프 대통령은 시위 초기 유화적 태도로 나와 총리 등 내각을 해산했다. 또 격렬한 시위로 시위대 수십 명과 경찰 10명 이상이 숨지는 불안이 지속되자, 시위 원인인 LPG 가격 상한선 폐지를 6개월간 유예하기로 했다고 6일 BBC가 보도했다.
하지만 대통령궁과 시장 관사에 방화가 발생하고 야간에 수백 명이 정부 청사 난입을 시도하자 6일 시위대를 테러 집단으로 규정하고 2주간 비상사태 및 야간 통금을 선포하는 등 강경책을 폈다.
토카예프 대통령은 7일 테러리스트들에게 사전 경고 없이 실탄 발사 경고를 내렸다고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