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외교안보 분야 원로로 꼽히는 헨리 키신저(99) 전 국무부 장관이 현재 미중 갈등을 중심으로 한 세계 정세를 1차 세계대전 전과 유사하다는 진단을 내놨다고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1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지난달 진행한 영국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미·중 대립과 관련해 “우리는 세계 1차대전 이전과 같은 고전적인 상황에 처해있다”며 “양쪽 모두 정치적으로 양보할 여지가 별로 없고, 균형에 대한 교란이 재앙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과 중국 공존 가능”…점진적 신뢰구축 강조
그는 미중 관계를 풀어내기 위해 우선 중국 지도자들의 생각을 이해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중국 수뇌부는 미국 주도로 짜인 서양의 질서 때문에 신흥 강자인 중국이 당연히 받아야 할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분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미국 정부가 중국의 야망을 잘못 해석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경고했다. 중국이 원하는 것은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처럼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이 걸렸을 때 국제사회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이란 게 그의 설명이다.
키신저 전 장관은 “미·중이 전쟁에 대한 위협 없이 공존하는 것이 가능하겠느냐”고 자문한 뒤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만 성공이 보장되지는 않을 것이라 덧붙인 뒤 “실패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실패를 지탱하기 위해 우리는 군사적으로 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미국과 중국이 긴장상태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점진적으로 신뢰와 협력 관계를 구축해야한다고 조언했다. 미국 대통령이 중국 국가주석에게 불만을 열거하는 대신 “현재 평화에 대한 가장 큰 위험은 우리 두 나라다. 인간사회를 파괴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5~10년 사이 AI가 인류 안보 위협 경고
그는 미국과 중국이 관계를 잘 풀어낼 수 있느냐에 인류문명의 존망이 걸려있다는 분석도 내놨다.
급격히 발달한 인공지능(AI)이 5~10년 사이 인류 안보에 커다란 위협을 초래할 수 있어 양국이 이를 통제하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키신저 전 장관은 “우리는 기계가 세계적 전염병이나 대유행을 유발할 수 있는 초창기 시대를 살고 있다. 이 전염병은 핵무기가 아니라 인류를 파괴하는 어떤 분야든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구체적으로 AI는 그동안 가능하지 않았던 일들을 가능하게 하면서 5년 이내에 안보의 핵심 요인으로 떠오를 것이라 봤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16~17세기 인쇄기술의 발달로 생각이 퍼져나가면서 숱한 전쟁이 일어났던 것과 비슷하다고 보고있다.
키신저 전 장관은 “군사적 역사를 보면 지정학적 한계 등으로 상대편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 가능한 적은 없었다”며 “하지만 이제는 한계가 사라졌다. 모두가 100% 취약하다”고 했다.
이러한 기술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한 만큼 미국과 중국이 보유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억제와 통제에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외교안보 정책 원로…27일 100번째 생일
이번 인터뷰는 키신저 전 장관의 100살 생일을 약 한 달 앞두고 진행됐다. 1923년 5월생인 그는 오는 27일 100번째 생일을 맞는다.
키신저 전 장관은 안보문제 전문가로 미국의 외교정책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하버드대 국제정치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핵무기와 외교 전문가로 정부 일을 함께 했고, 1969년 당시 닉슨 대통령이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발탁하면서 정치가로 변모했다.
중국, 소련, 베트남, 중동 등지에서 외교적 성공을 거두었고, 베트남 분쟁을 해결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3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1974년 닉슨 사임 후에도 계속 국무장관으로 일하면서 제럴드 포드 대통령 밑에서 외교업무를 주도했다.
현재는 최고령 전직 미국 내각 인사이자 닉슨 내각의 마지막 생존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