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경 민주당 혁신위원장의 시누이 김지나씨가 5일 ‘브런치스토리’에 김 위원장의 가정사를 폭로하는 글을 올려 파장이 커지고 있다.
김지나씨는 이 글에서 “피 토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라며 “김은경 같은 인간이 절대로 평범하게 살아서도 안 되지만, 높은 위치에서 국민을 우롱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썼다.
그는 “분통함에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하시고 세상을 떠나신 우리 부모님이 더이상 원통하지 않고 편안하게 이승을 떠나게 도와달라”며 “더 이상 남편의 죽음이 한낱 사랑 타령이라는 거짓으로 욕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친다”고 했다.
김지나씨는 2003년 미국으로 이민해 현재 메릴랜드주 메리엇츠빌에 거주하고 있다. 김지나씨는 2020년 3월 이민사회를 그린 <킴스 패밀리 인 아메리카>(Kim’s Family in America)를 펴냈다.
미주한국일보 칼럼니스트로 ‘김지나의 살며 살아가며’를 쓰고 있다. 풍문여고, 덕성여대 졸업 후 인테리어 디자이너로도 일했다.
다음은 김지나씨가 ‘브런츠스토리’에 올린 글 전문이다.
저는 김은경 민주당 혁신 위원장의 시누이입니다.
그녀가 금감원의 부원장으로 취임을 했을 때에도, 아버지가 비극적인 생을 마감하셨을때에도, 그리고 민주당 혁신위원장으로 이름을 날릴때까지도 조용히 지나가길 바랬습니다. 하지만 며칠 전 노인폄하 논란을 일으키고 ‘남편 사별 후 18년간 시부모님을 모셨고 작년 선산에 묻어 드렸다. 그래서 어르신에 대해 공경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산 적은 없다’고 말한 내용을 보고서 이는 도를 넘는 행위이고 이런 사람은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아 마땅하기에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단적으로 남편이 살아 있을때를 포함 단 한차례도 시부모를 모시고 산 적이 없고 공경심은 커녕 18년동안 김은경에게 온갖 악담과 협박을 받으셨고 돌아가시면서도 쉬이 눈을 감지 못하셨습니다. 이에 더 이상 돌아가신 분들을 욕보여드리지 않기 위해 어렵지만 무거운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다소 긴 글이지만 꼭 끝까지 읽고 판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도미한 지 20년이 되었고 저와 남편은 사업을 하고 있고 아이 셋을 건강하게 키우고 있는 보통 사람입니다. 조금 덧붙이면 미국에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고 미주 한국일보 칼럼니스트이기도 합니다.
김은경은 1992년 제 오빠와 결혼을 했습니다.
둘은 이문동에 있는 한국 외국어 대학교 법대 캠퍼스 커플로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지만, 부부는 공부를 위해 독일 유학길에 올랐고 아이는 저희 부모님이 맡아 키우셨습니다. 오빠가 먼저 귀국해서 아버지 밑에서 사업을 배우고 김은경은 만하임 대학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아 한국에 귀국했지요.
오빠는 아버지와 함께 사업을 하면서 공부하는 아내를 위해 독일로 돈을 보내고 아이를 부모님과 키우는 기러기 아빠가 되었어요. 귀국 후 대학교 강사라는 기회를 갖고 그 뒤로 교수라는 명함을 얻게 되었는데 오빠의 재력과 양육의 도움이 없었다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고 그 당시에 부부는 자랑삼아 이야기했습니다.
김은경의 친정집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어머니를 일찍 여읜 김은경은 친엄마가 살아생전 언니 동생하며 친하게 지내던 분을 새어머니로 주선해 아버지가 재혼을 하셨어요. 새어머니는 헌신적으로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셨고 아이 셋의 뒷바라지를 착실히 하셨던 분이셨어요. 하지만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김은경과 두 남동생은 새어머니에게 상속 포기 각서를 쓰게 했다고해요.
김은경이 그 당시 법대를 나왔기에 법적으로 재산에 관한 분할을 잘 알고 있었지요.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쫓겨난 새어머니는 저희 가족을 찾아오셔서 억울함을 호소하셔서 알게 되었는데, 각서를 받은 뒤 오랫동안 살았던 집 비밀번호를 바꿔버리고 오히려 주거 침입죄로 경찰에 신고하는 비윤리적인 행동에 정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새어머니는 남의 집에서 도우미 일을 하시며 근근이 생활하셨고 그 후로는 어떻게 되셨는지 생사를 알 길이 없었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대를 이어야 하는 손주라며 최고의 유치원과 학교에 보내셨고 공부하는 며느리에게 힘내라는 손편지를 셀 수 없을만큼 보내셨습니다. 박사 학위를 당당히 받고 귀국 한 김은경은 학교 일이 바쁘다며 시댁 일에 등한시하더니 손자까지 길러주신 시부모와 갈등이 심해졌고 말끝마다 60세가 되면 이혼 할 거라는 말을 공공연히 흘리며 남편과의 사이가 멀어지고 있음을 내비쳤습니다.
사건은 2006년 1월에 일어났습니다.
오빠가 자신의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집에 아이들과 아내가 같이 있고 초저녁이었고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라 모두가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우리 가족은 부검을 원했지만, 아내인 김은경은 그럴 필요가 없다며 강하게 부인했습니다. 김은경이 묘사한 그 날의 상황은,
“오빠가 제 무릎을 베고 누워서 저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침이 내 무릎에 흐를 만큼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하고 들어갔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하지만 사고가 있는 직후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이제 겨우 서너 살이 된 둘째 아이의 반응은,
“엄마랑 아빠가 막 싸웠어. 그래서 아빠가 화가 나서 뛰어내렸어”
자, 어떤 말이 진실일까요?
그 당시 오빠의 경제적 상황은 이랬습니다. 친정 아빠는 전기사업을 시작으로 소방과 관련된 특허를 9개 가지고 계셨고 특허 된 제품으로 승승장구하셨던 참에 오빠의 도움으로 날개를 다셨습니다. 오빠는 그 덕으로 세무조사를 받아야 할 만큼 재산이 불어났고 그 당시 강남에 있는 아파트와 빌라를 매입했습니다. 활발하고 사업 수단이 좋은 덕에 경제적으로 가정에 충분한 부를 가져다주었고 아내인 김은경은 오로지 학업과 강의에만 전념하면 될 상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랬는데 갑자기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는 집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한다?
200명이 넘는 오빠 친구들이 장례식에 왔습니다.
한결같이 하는 말은 ‘친구가 이렇게 많은데 자살을 한다고?’ ‘다음 주에 골프 약속이 있는데 이럴 수가..’ ‘항상 웃고 다니고 돈도 잘 쓰는 친구인데 이런 일이?’ ‘자식 사랑이 대단한 친구인데 자식 앞에서?’ 장례식장에 모인 친구들의 한결같은 말로 의심의 꼬리를 이어갔습니다. 절대 믿기지 않다는 말을 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자살을 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김은경은 오빠가 떨어져 죽은 그 순간부터 장례가 끝난 우리가 본 어떤 순간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누워 침을 흘리며 사랑한다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는데 어떻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을까요? 장례가 끝난 바로 다음 날 남편의 사망 신고를 한 건 물론이고 오빠가 타고 다니던 고급 차를 바로 처분하더군요. 그리고 그 집에서 아이들과 무서워서 살 수 없다며 그 당시에 제일 잘 나가던 강남 서래마을로 서둘러 이사를 했습니다.
더욱 황당한 일은 어수선한 틈을 타 아빠의 사업체를 자신의 친동생 이름으로 바꾼 일입니다. 어찌 된 일인지 사업체는 오빠가 죽기 직전 시아버지의 이름에서 오빠의 이름으로 전환되어 있었고 죽고 나니 곧바로 김은경의 친동생 이름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아빠는 즉시 시정을 요구하고 법에 호소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어찌 손을 써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더군요. 치밀한 계획하에 이루어진 일이고 워낙 법적으로 잘 아는 김은경이라 우리는 앉아서 당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습니다.
사업체를 통째로 빼앗긴 저희 부모님은 어찌 되셨겠습니까?
하나뿐인 아들을 그것도 그렇게 반듯하게 키운 아들을 잃은 고통도 모자라 두 분이 그동안 땀 흘려 일구어 놓은 사업체까지 며느리가 가로채 갔으니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결국, 어머니가 그 충격으로 쓰러지셨습니다. 요즘 흔한 노인성 치매가 아닌 한마디로 너무 심한 충격을 심적으로 받아 정신을 놓아버린 거지요. 손을 쓸 수 없는 정신적인 병인지라 먹는 약도, 돌볼 방법도 없이 모든 것이 뒤죽박죽 흘러버렸습니다.
어머니는 요양원에 모셔지고 아버지 또한 기력이 다하셔 시골로 터전을 옮기셨습니다. 그래도 부모님은 손수 키우신 귀한 손자의 연까지 끊을 수는 없었기에 명절에 손자의 통장으로 용돈을 넣어주시며 그 끈을 이어나가셨습니다. 명절은커녕 자신의 남편 제사에도 한번 참석하지 않은 사람이 남편 사별 후 18년간 시부모님을 모셨다는 그런 새빨간 거짓으로 우리 가족 모두를 기만한 파렴치한 김은경이기에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이 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18년을 사시다가 2년전 어머님을 먼저 보내시고 작년 겨울, 끝내 자살한 아들이 너무도 그리운 아버지는 자식과 똑같은 방법으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선산에 묻혀 드렸다는 말을 했는데요, 남편 자살 이후 시부모의 사업체까지 빼돌린 며느리가 왜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왔겠습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사별한 남편의 시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며느리 노릇을 한다라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겠지만, 잘난 금감원 부원장이라는 타이틀로 보내온 부의금을 챙겨가는 모습을 본 우리는 그만 망연자실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 가시는 길에 흙 한 줌 뿌리라는 말에 손사래 치며 거절을 한 장본인이 김은경이고 이번 노인폄하 논란의 시작이 된 그 아들 또한 눈을 부라리며 엄마와 함께 할아버지에게 흙 한 줌 넣어드리지 않았습니다. 이번 노인폄하 사태를 보면서 역시 인간은 본성을 숨길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저에게 누구는 그럽니다.
피를 거꾸로 쏟아내는 일이지만, 같이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입장이니 앞날을 생각해서 그냥 침묵하라고 합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험난한 일이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 위험을 무릅써야만 할 수 있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피 토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절대로 평범하게 살아서도 안 되지만, 높은 위치에서 국민을 우롱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분통함에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하시고 세상을 떠나신 우리 부모님이 더 이상 원통하지 않고 편안하게 이승을 떠나게 도와주시고 더 이상 남편의 죽음이 한낱 사랑 타령이라는 거짓으로 욕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칩니다.
응원 부탁드립니다.
미비한 글이지만 널리 알려주세요.
긴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미국에서 김 지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