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 총선이 끝난 지 2주가 지난 가운데, 지지하던 후보가 낙선해 우울감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선거 후 스트레스 장애'(PESD)를 겪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정치적 극단주의가 계속되면서 증상자가 더욱 늘어날 것이라 내다봤다.
24일 뉴시스 취재를 종합하면, 경기 평택시에 사는 박모씨(58)씨는 지난 10일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신이 지지하던 후보가 낙선하자 최근 밥을 잘 먹지 못하고 나라 걱정만 하고 있다고 했다.
특히 당선된 다른 후보가 ‘투표에 감사드린다’는 플래카드를 걸어놓은 것을 봤을 땐 울컥 화가 나기도 했다. 박씨는 “당선되길 바랐던 후보가 떨어지고, 지지하던 당도 전체적으로 약세인 걸 보니 마치 나라가 망할 것 같은 불안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선거 당일 밤새 개표 결과를 지켜봤다는 전모(62)씨도 지지 후보가 낙선하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마음속 응어리가 진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다고 했다.
전씨는 “평소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이번 총선에서 꼭 제가 지지하던 후보와 당이 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그런데 투표 결과가 딴판이다 보니 충격이 컸고, 마치 내가 경기에서 패배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우울하다”고 했다.
이처럼 자신이 열정적으로 지지하던 후보가 선거에서 낙선했을 때 불안감·우울감·분노 등 심리적 후유증에 시달리는 경우를 ‘PESD'(Post-Election Stress Disorder·선거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한다.
전쟁·교통사고 등 충격적인 일을 겪은 뒤 극심한 심리적 고통을 느끼는 정신질환인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빗댄 것으로, 지난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당시 공화당 후보가 당선되자 심리적으로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생긴 용어다.
미국 정신건강 플랫폼인 베터헬프는 PESD의 주요 증상으로 ▲절망감 ▲끊임없는 걱정 ▲두통 ▲불면증 ▲근육통 등을 꼽았다.
특히 이번 총선은 67.0%의 투표율을 기록하며 지난 1992년 이후 3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할 만큼 투표 열기가 뜨거웠다. 그만큼 자신이 투표한 후보가 낙선하자 우울감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아진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 온라인상에서는 총선 관련 기사 댓글에 ‘나라가 망했다고 생각하니까 밥이 안 넘어간다’ ‘열심히 응원했는데 허탈하다’ ‘나라 망할 게 뻔하니 이제 이민 가려 한다’는 등의 반응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PESD를 겪는 이유는 특정 후보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심리 상태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현재 대한민국에 팽배한 정치적 극단주의가 PESD를 만성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치학자인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는 “지금 대한민국 정치는 여와 야로 구분돼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식의 극단주의가 강해지고 있다”며 “서로를 악마화하는 분노 정치가 심해지면서,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지면 악마에게 나라가 넘어간 것 같은 분노와 좌절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결국 PESD라는 것은 정치인을 자신의 요구를 대변해 줄 대표자 중 한 명으로 보는 게 아니라, 자신의 분신이자 심하면 자신의 구세주라고 봐서 겪는 것”이라며 “이런 생각이 극단으로 치닫게 되면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 후보에게 위해를 가해도 된다는 식의 생각으로 번질 수 있어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지난 1월2일 부산 강서구 가덕도 대항전망대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목을 흉기로 찌른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김모(66)씨는 “좌파 세력을 막기 위해 이 대표를 처단해야 한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자신의 범행을 ‘안중근 의사와 이봉창 의사와 같은 독립 투사의 희생’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발달이 자신이 믿고 싶은 정보만 찾아보고 반대되는 견해는 무시하는 ‘정치적 확증편향’을 강화해, PESD를 겪는 이들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문행 수원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유튜브가 추천해 주는 채널들을 보다 보면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계속해서 사고를 공유하게 되고, 이것이 고정관념과 편견을 키우게 된다”며 “결국 상대 후보를 음해하는 내용의 가짜뉴스조차 그대로 믿게 되고, 그 상대 후보가 이기면 실망을 넘어 분노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안 교수는 “서로 악마화하는 정치적 극단주의가 계속되는 한, PESD를 겪는 이들은 점점 더 많아질 수밖에 없다”며 “특정 후보에 대한 동일시에서 오는 PESD와 그를 넘어선 정치적 극단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유권자들은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 상대 진영에 대한 객관적인 시선을 가져야 하며 정치권은 이런 유권자들의 믿음을 지켜주기 위해 신뢰할 수 있는 정치를 펴는 등 바로 서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