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겸 “엄중한 시기에 왜 진보-보수 논쟁 끌어들이나”
양기대 “총선 때 ‘진보개혁’ 외치더니…상황 따라 말 바꿔”
정혜영 “진보 궤멸하니 보수라 해…오직 힘 추구하는 조직”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민주당은 중도보수 정권으로 오른쪽을 맡아야 한다”고 발언한 것을 두고 19일 당 안팎에서 파장이 일고 있다. 비명(비이재명)계는 “당 정체성을 공론화 과정 없이 혼자 결정하는 것은 월권”이라고 반발하고 나섰다.
김부겸 전 국무총리는 이날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이 대표가 이 엄중한 시기에 왜 진보-보수 논쟁을 끌어들이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 민주당의 정체성을 혼자 규정하는 것은 월권이다. 비민주적이고 몰역사적”이라고 지적했다.
김 전 총리는 “민주당은 김대중·노무현의 정신을 계승하는 정당이고, 70년 자랑스러운 전통을 가진 정당”이라며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당을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이라고 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고 했다. 민주당은 강령에 ‘서민과 중산층을 대변한다’고 명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강령은 당의 역사이자 정신”이라며 “(강령의 내용을 바꾸려면) 충분한 토론과 동의를 거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이 대표가 민주당을 ‘중도보수’로 규정한 데 대해 “진보의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당을 이끌고 지지해온 우리 당원들과 지지자들의 마음은 어떻겠느냐”고 비판했다
비명계 총선 낙선·낙천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모임 ‘초일회’ 간사인 양기대 전 의원은 “민주당과 이재명 대표가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총선에서 ‘진보 개혁’을 외치며 표를 얻었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민주당의 정체성을 중도보수 정당으로 규정하는 모습을 보니 그가 과연 어떤 정치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고 직격했다.
양 전 의원은 “조기 대선을 앞두고 ‘우클릭’ 등의 연장선에서 나온 즉흥적인 발언으로 여겨진다”며 “이재명 정치의 본질이 드러났다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당연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재명 대표가 당의 정체성을 무시한 채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고, 필요할 때마다 정당의 가치를 뒤집는다면 어느 국민이 그 정당을 신뢰하겠느냐”고 반문했다.
박지현 전 비상대책위원장도 이날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실용을 강조하더니 이제는 민주당이 보수 정당이 되겠다는 것이냐”며 “실언이라고 인정하고 민주당 지지자들께 사과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의 민주당 역사가 있다. 민주당의 정체성을 바꿀 권한이 4년짜리 대표에게 있지 않다”며 “민주당 의원님들이 나서서 민주당의 노선이 중도 진보임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고 촉구했다.
다른 야당에서도 반발이 터져 나왔다. 정혜영 전 정의당 의원은 이날 페이스북에 “진보이자 보수이자 모든 것이자 아무것도 아닌 민주당”이라고 적었다. 정 전 의원은 “지난 총선 민주당발 위성정당 초기 이름은 ‘민주개혁진보연합’이었다. 그렇게 기어코 위성정당으로 진보정당들의 독자세력화를 변질시키거나 주저앉혀 ‘진보’가 궤멸하니 이제 민주당은 자기가 ‘보수’라 한다”고 저격했다.
그는 “민주당은 진보이자 보수이자 모든 것이며 그러므로 아무것도 아닌, 오직 힘 그 자체를 추구하는 정치조직”이라며 “민주당의 약속은 자기 자신 이외에 누구를 위한, 어떤 세상을 위한 약속인가. 우린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보이자 보수이므로. 원할 때마다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버릴 수 있으므로”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전날 야권 성향 유튜브 ‘새날’에 출연해 “앞으로 민주당이 중도보수로 오른쪽을 맡아야 한다”며 “우리는 진보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어 “(민주당은) 사실 중도 보수 정도의 포지션을 실제로 갖고 있다”며 “진보 진영은 새롭게 구축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 이후 기자들과 만나서도 “자주 이야기하는데 민주당은 원래 성장을 중시하는 중도보수”라며 “국민의힘은 극우보수 또는 거의 범죄 정당이 돼가고 있다”고 했다.
그는 “우리는 원래 진보 정당이 아니다”라며 “진보 정당은 정의당과 민주노동당 이런 쪽이 맡고 있는데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 대표가 ‘중도보수’를 선언한 건 조기 대선을 염두에 두고 전통적인 지지층을 넘어 중도·보수층을 공략하려는 의도라는 평가가 나온다. 연일 ‘실용주의’ 성장 담론을 강조하고 있는 행보의 연장선으로 이념에 얽매이지 않는 경제 정책을 내세워 ‘가짜 우클릭’ 공세에 대응하려는 차원으로도 해석된다.
당 주류인 친명(친이재명)계와 중진 등은 “민주당은 중도보수가 맞다”고 지원 사격에 나섰다.
지도부 관계자는 “여당이 극우 정당으로 변질된 상황이기 때문에 민주당이 오른쪽 포지션도 챙겨야 한다는 의미”라며 “박근혜 전 대통령이 과거 ‘경제민주화’를 내세웠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중도층을 공략하는 측면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민주당은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정당이지 진보 정당은 아니다”라며 “중도, 보수라는 개념은 상대적인 것으로 사안마다 학자마다도 다르다. 이 대표의 발언이 민주당의 정체성과 배치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5선의 정동영 의원은 KBS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 대표의 ‘민주당은 중도보수’ 발언에 대해 “유럽식 기준으로 보면 민주당은 진보정당이 아니다. 정말 중도보수 정도의 정당”이라고 말했다.
이어 “독일의 사민당(사회민주당)은 확실한 진보정당이지만 (우파 정당인) 기민당(기독민주당)은 우리 기준으로 보면 거기도 굉장한 진보로 보인다”며 “그런 의미에서 한 얘기라고 생각한다”고 부연했다.
다만 강경파로 분류되는 3선의 진성준 정책위의장은 이 대표의 발언에 대해 “민주당의 정치적인 이념 성향을 규정하자면 중도 보수적인 스탠스가 맞다”면서도 “중도 보수를 지향한다는 게 아니다. 당은 진보적인 지향을 하고 있다”고 진화에 나서기도 했다.
한 수도권 의원은 “구체적인 부연 설명 없이 ‘중도보수’만 부각되다 보니 불필요한 오해를 산 측면도 있다”며 “당 정체성을 두고 논쟁이 이어질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