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선 지금 시간당 최저임금을 15달러로 정하는 문제를 두고 논란이 한창이다. 아마존과 같은 대기업이 15달러를 지급한다고 발표하면서 적지 않은 다른 기업들이 충격을 받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진보 사상가들은 15달러만으로는 노동자들의 “생활”을 보장하는데 크게 부족하다며 대폭 인상해야 한다고 반박한다. 미국 노동자들의 임금 정체가 최고경영자(CEO)가 턱없이 많은 돈을 가져가기 때문이라는 주장과 함께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28일(현지시간) 이같은 주장을 펴는 대표적 경제학자인 MIT대학교 닉 로메오 교수의 칼럼을 게재했다. 다음은 칼럼 요약이다.
생활임금이라는 개념은 아담 스미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칼 마르크스 등 성향이 다른 옛 사상가들이 모두 관심을 가졌던 주제다. 그러나 정확한 의미는 여전히 모호하다. 테오도르 루즈벨트 전 미 대통령은 지난 1912년 한 연설에서 생활임금이 노동자들이 교육, 오락, 육아, 질병휴가, 노후 보장 등 “정상적 생활수준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루즈벨트의 발언은 경제학적 의미를 갖기보다는 도덕적 주장에 가까운 것이다. 그는 노동자들에게 기본적 생활을 보장해주는 것을 공정의 문제로 접근했다.
100년 이상 지난 지금도 수백만에 달하는 미국 노동자들이 여전히 루즈벨트가 제시한 것에 턱없이 못미치는 임금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저임금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정상적 생활수준”을 어떻게 정하고 누가 누려야 하는 지에 대한 정치적, 도덕적 선택의 결과일 뿐이다.
생활임금을 유효하게 정의하는 데는 두가지 어려움이 따른다. “생활”이라는 관대한 정의에 담긴 도덕적 명제의 문제와 미국처럼 지역에 따라 편차가 크고 계층분화가 심한 나라에서 생활비가 얼마나 드는지를 규정해야 하는 경험적 문제가 있다. 몇몇 “생활비 계산기”들이 이 과제에 도전했다. 현재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은 MIT대학교 경제지리학자 에이미 글래스마이어가 만든 것이다.
글래스마이어의 계산방식은 한 가계에 포함되는 아동의 수와 일하는 성인들의 숫자를 기반으로 이 가계가 속한 공동체의 조건에 맞춰 주거비, 육아비, 교통비, 의료비, 식료품비 및 기타 일반비용(세제 등) 등을 산출한다.
글래스마이어는 최근 매달 자신이 만든 생활비 계산기 사이트에 매달 약 10만명이 방문하고 있으며 크고 작은 회사 고용자들로부터 임금을 정하는데 것과 관련해 질문을 받는다고 밝혔다.
반면 미국 전역에서 글래스마이어가 산출한 생활임금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다고 불평하는 이메일도 매달 수십통씩 받고 있다고 한다.
그가 만든 생활비 계산기는 외식, 선물, 학비 상환 및 대출금 상환, 은퇴자금, 비상금, 휴가비 등을 포함하지 않는다.
생활하기에 충분한 임금을 주지 않는 것은 그들이 생활을 지속하는지에 대해 무관하다는 것을 뜻하고 기본적 품위를 훼손하며 나아가 민주주의의 기초를 허무는 것이다. 많은 회사들이 갈수록 보다 인간적인 보상체계를 도입함에 따라 생활임금을 어떻게 정할 것이냐의 문제가 보다 폭넓은 공공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 역사를 살펴보면 임금을 결정하는데 있어 도덕의 문제가 많이 개입돼 왔다. 종교사상가 존 라이언이 1906년에 쓴 “생활 임금: 도덕적 측면과 경제적 측면”이라는 책에서 생활임금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보장하는 것은 물론 “보다 폭넓고 만족스러운 생활조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임금은 도덕과 무관한 문제라는 주장을 따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1926년 한 학자가 “공정한” 임금은 “형용모순”이라고 말했다. 1980년대까지 많은 경제학자들이 이 견해를 따랐으며 한 학자는 경쟁이 있는 시장은 “도덕과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시장에서 도덕을 배제하는 것은 그 자체로 도덕적 선택이다. 도덕을 배제한 생활임금을 계산하는 것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수익률이 매우 낮은 회사의 고용주들은 생활임금을 지급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라이언은 그런 기업은 상황이 안 좋을 때 굳이 생활임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사업이 성공하려면 생활임금을 지급할 수 있어야 하며 그렇지 못한 기업은 사업을 이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생활임금을 지급해야 하는 고용주들이 고용을 줄임으로써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이같은 생각은 경험상, 또 논리적으로도 얼마든지 반박할 수 있다. 미국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이 정체된 것은 그들의 생산성이 낮기 때문이 아니라 회사내 부의 집중이 심해진 때문이다. 1965년 미국 최고경영자들은 평균노동자 임금의 21배를 받았으나 지난해는 351배였다.
글래스마이어박사의 생활비 계산기로 산출한 금액은 연방정부의 최저임금인 시간당 7.5달러보다 월등히 많다.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의 경우 생활비는 30.02달러,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카운티는 52.12달러로 계산된다.
이 숫자는 최저임금을 15달러로 하자는 주장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많은 지역에서 보다 현실적인 최저임금은 50달러이다. 이 금액도 사실 생활비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전화비, 자동차주차비, 코로나 등 의료검사비, 일자리를 잃었을 때를 대비한 비상금이나 베이비시터 비용 등은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수준의 생활을 보장하는 임금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당신에게 물건을 배달해 주는 사람이 가족과 함께 한달에 한번 외식조차 못하고 노후와 휴가를 위한 저축을 하지 못하는 것이 잘못됐다고 느낀다면 생활임금에는 글래스마이어 박사가 계산하는 것보다 많은 것들이 포함돼야 마땅하다. 생활임금을 지급한다는 평판을 가진 회사라면 글래스마이어 박사의 계산기가 산출하는 생활비가 충분치 않다는 것을 안다.
하버드의 철학자 마이클 샌델은 정책 자문가로서 경제학자들의 역할이 커지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일하는 것의 존엄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시민으로서 우리가 서로에게 지고 있는 의무는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답을 테크노크라트들에게 떠넘기고 있다”고 말했다.
“생활”을 어떻게 지탱할 것인지의 문제는 민주주의 사회가 반드시 공개 토론해 지속적인 정책으로 구현해야 하는 문제다. 미국 노동운동가 새뮤얼 곰퍼스는 1898년 생활임금이 “평균 규모의 가정이 현재의 문명에 따라 물질적, 정신적 건강에 필요한 모든 것, 즉 합리적인 자존적 인간 존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유지하는데 충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시민들이 “합리적인 자존적 인간 존재”가 필요로 하는 만큼의 임금을 주는 일자리를 가지고 있는 지를 자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