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미국 래퍼 겸 싱어송라이터 앤더슨 팩(Anderson .Paak)과 팝스타 브루노 마스가 결성한 프로젝트 듀오 ‘실크 소닉(Silk Sonic)’, 재즈 뮤지션 존 바티스트, ‘괴물 신예’ 올리비아 로드리고가 ‘제64회 그래미 어워즈’ 주인공이 됐다.
실크소닉은 3일 라스베이거스 MGM 그랜드 가든 아레나에서 열린 미국 최고 귄위의 음악 시상식인 이번 ‘그래미 어워즈’에서 ‘리브 더 도어 오픈(Leave The Door Open)’으로 4대 본상인 ‘올해의 레코드’와 ‘올해의 노래’를 비롯 ‘베스트 R&B 퍼포먼스’ ‘베스트 R&B 송’ 등 4관왕을 안았다.
실크소닉이 지난해 3월 발매한 ‘리브 더 도어 오픈’은 음원도 차트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빌보드 메인 싱글차트 ‘핫 100’에서 2차례에 걸쳐 1위를 기록했다.
특히 마스는 미국의 포크 록 듀오 ‘사이먼 앤 가펑클’ 멤버 폴 사이먼에 이어 ‘그래미 어워즈’에서 ‘올해의 레코드’를 세 번 수상한 유일한 뮤지션이 됐다.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을 잇는다는 평을 듣는 마스도 대단한 뮤지션이지만 앤더슨 팩 역시 천재 뮤지션으로 통한다. 1960~70년대 풍의 흑인 음악을 꾸준히 추구해온 그인 만큼, ‘리브 더 도어 오픈’에서 차지하는 그의 비중 역시 크다.
앤더슨 팩이 한국 음악 팬들에게 주목 받는 이유는 한국계이기 때문이다. 한국계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앤더슨 팩의 가정사를 이야기하려면, 6·25 동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참전한 미군과 할머니가 결혼을 해 그의 모친을 낳았다. 모친은 고아원에서 자라다, 미국 가정에 입양됐다.
앤더슨 팩의 팩(Paak)은 박(Park) 씨 성을 가진 어머니가 입양 당시 서류에 팩(Paak)으로 잘못 기재되면서, 붙여졌다고 한다. 그의 이름에 우리의 아픈 근현대사의 역사가 묻어 있는 셈이다. 이 사실을 안 한국 팬들은 그를 ‘밀양 박씨’라 부르며 친근하게 대했다. 가족의 안타까운 사연은 대를 이었다. 폭력적인 아버지가 수감된 이후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일자리를 잃고 마리화나 농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2011년부터 로스앤젤레스를 기반 삼아 음악을 시작했다. 첫 활동명은 브리지 러브조이였다. 이듬해 얼터너티브 힙합 그룹 ‘SA-RA’ 멤버 샤피그 후세인을 만나면서 그의 음악적 재능이 만개한다. 지난 2015년 힙합계 대부 닥터 드레의 ‘컴튼(Compton)’ 중 6곡에 참여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이듬해 발매한 정규 2집 ‘말리부(Malibu)’로 ‘음악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급부상했다.
솔뿐만 아니라 재즈, 펑크, 힙합 등 장르 불문 탁월한 재능을 뽐내는 그는 2019년부터 올해까지 4년 연속 그래미 어워즈를 품에 안았다. 지난 2015년 한국 싱어송라이터 딘(Dean)의 ‘풋 마이 핸즈 온 유(Put my hands on you)’를 작업하는 등 한국 음악계와 꾸준히 인연을 맺어왔다.
“김치찌개를 좋아해”라는 말을 R&B 발라드로 소화한 영상은 작년에 한국 팬들 사이에서 크게 회자됐다. 한국인 여성과 결혼했는데, 그의 아들은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팬으로 알려졌다. 앤더슨 팩은 자신의 아들 솔(Soul)이 방탄소년단의 ‘마이크드롭(Mic Drop)’ 안무를 따라하는 영상을 소셜 미디어에 게재하기도 했다. 최근 실크 소닉은 라스베이거스에서 콘서트를 열었는데 방탄소년단 멤버 지민, 슈가, RM이 방문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1970년대 스타일의 수트 차림으로 차려입은 실크 소닉은 상을 받을 때마다 일어서면서 섹시한 춤을 췄다. 앤더슨 팩은 “우리는 겸손하게 지내기 위해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그것을 싹쓸이라 부른다”고 했다.
바티스트는 여덟 번째 정규 음반 ‘위 아(We Are)’로 그래미 4대 본상 중 하나인 ‘올해의 앨범’ 상을 비롯 5관왕을 안았다.
특히 ‘올해의 앨범’은 쟁쟁한 후보군으로 접전이 예상됐던 분야다. 로드리고, 빌리 아일리시, 테일러 스위프트, 토니 베넷과 레이디 가가 등 내로라하는 뮤지션 중에서 역전극을 이끌어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정통적인 재즈 기반 위에 솔, 가스펠, 힙합 등의 장르를 유연하게 아우른 앨범 ‘위 아’는 생기로운 연주와 짜임새 있는 구조로 지난해 호평을 들었다. 미국 CBS ‘레이트 쇼 위드 스티븐 콜베어’ 밴드 리더이자 픽사 애니메이션 ‘소울’ OST 작곡가인 바티스트는 이번 시상식 전 11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최다 후보 지명자가 되면서 기대를 모았다.
바티스트는 이날 ‘올해의 앨범’ 상을 받은 직후 “함께 후보에 오른 분들의 음악을 들으면서 (애니메니션 ‘소울’처럼) 저 세상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면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 개성을 따라 본 모습을 찾아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괴물 신예’로 통하는 로드리고는 많은 이들의 예상대로 그래미 4대 본상 중 하나인 ‘베스트 뉴 아티스트'(신인상)를 비롯 베스트 팝 솔로 퍼포먼스, 베스트 팝 보컬 앨범 등 3관왕을 차지했다.
로드리고는 지난해 ‘드라이버스 라이선스’로 방탄소년단의 ‘버터’와 빌보드 메인 싱글차트 ‘핫100’ 1·2위를 두고 장기간 치열하게 경합해 국내 음악 팬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 곡은 ‘버터’가 1위를 차지하기 전 무려 ‘핫100’에서 8주간 1위를 차지하며 신드롬을 일으켰다. 이후 로드리고는 ‘Z세대의 아이콘’으로 통하게 됐다.
로드리고는 이날 ‘베스트 뉴 아티스트’ 상을 받은 후 “제 가장 큰 꿈이 이뤄졌다. 한때 올림픽에 출전하는 체조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에서 가수로 꿈을 전환하는 가운데 저를 지지해준 부모님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또 이날 시상식에서 러시아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제64회 그래미 어워즈’ 시상식 도중 영상으로 깜짝 등장, 전쟁 반대와 함께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더 이상 음악이 흐르고 있지 않고 있다. 음악의 반대말인 죽음의 적막만 흐르는 중”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우리나라 음악가들은 턱시도가 아닌 방탄복을 입고 있다. 우리 삶에서 음악이 더 이상 빠지지 않게 침묵하지 않고 도와 달라. 개인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많이 알려달라”고 호소했다.
이어 무대에 오른 미국 R&B 스타 존 레전드가 피아노를 연주하며 ‘프리’를 불렀다. 무대 뒤 대형 스크린에는 피해를 입은 우크라이나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영상이 등장했다. 우크라이나 가수 미카 뉴턴, 최근 우크라이나를 탈출한 시인 류바 야킴추크, 우크라이나 망명자들이 레전드 무대를 함께 했다.
또 이번 시상식에서 95세의 재즈 가수 토니 베넷은 그래미 시상식 역대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수상자로 기록됐다. 팝 수퍼스타 레이디 가가와 함께 지난해 발매한 앨범 ‘러브 포 세일(Love for Sale)’로 ‘트래디셔널 팝 보컬 앨범(traditional pop vocal album)’을 받아 해당 부문을 14번째 수상하게 됐다. 베넷이 지금까지 그래미 어워즈에서 받은 트로피 개수는 20개다.
이와 함께 이날 시상식 도중에는 최근 남미 투어 중 50세를 일기로 사망한 미국 하드록을 대표하는 ‘푸 파이터스(Foo Fighters)’의 드러머 테일러 호킨스를 추모하는 시간도 가졌다.
또 AP통신 등 상당수 외신은 이날 퍼포머로 나선 그룹 ‘방탄소년단'(BTS) 멤버 뷔가 히트 싱글 ‘버터’ 무대를 선보이면서 로드리고와 귓속말로 나눈 대화에 온라인이 시끌벅적해졌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뷔는 ‘버터’ 공연 도중 객석 밑으로 내려가 명함을 꺼내 던지며 이 같은 퍼포먼스를 펼쳤다. 일부 누리꾼은 넷플릭스 한국 오리지널 ‘오징어게임’에 등장하는 명함을 떠올렸다.
그래미 시상식 진행자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코미디언 트레버 노아는 방탄소년단 멤버들과 객석 인터뷰에서 최근 한국 드라마에서 배운 말이라며 ‘오징어 게임’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말하기도 했다.
RM은 이날 노아가 미국 시트콤 ‘프렌즈’를 보고 영어를 공부했다고 들었다고 묻자 “맞다. ‘프렌즈’는 내 영어의 부모님”이라고 답해 객석의 웃음을 끌어내기도 했다.
방탄소년단은 이날 ‘버터’로 ‘베스트 팝 듀오/그룹 퍼포먼스(BEST POP DUO/GROUP PERFORMANCE)’ 부문에 올랐으나 수상은 하지 못했다. 올해 해당 부문의 트로피는 도자 캣&시저의 ‘키스 미 모어(KISS ME MORE)’에게 돌아갔다.
한편 이번 그래미 어워즈는 그간 비판을 받던 백인 위주의 시상 일변도에서 벗어났다는 평을 들었다. 특히 본상 4개 부문에 백인이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앤더슨 팩과 팀을 이룬 마스는 푸에르토리코계이며, 바티스트는 흑인이다. 로드리고는 필리핀계 미국인 아버지와 아일랜드·독일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