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독일이 유럽의 연대를 강화하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25일 보도했다.
독일은 오래도록 유럽의 실질적인 리더였지만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에 소극적이었다. 또 독일은 천연가스 가격 상승으로 인한 유럽연합(EU)의 가난한 나라들의 고통을 완화하는 대신 자국민들에게만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했다.
라트비아의 아르티스 파브릭스 국방장관은 지난 주 베를린의 한 공개 회의에서 “독일을 믿을 수 있는가”라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독일의 소극적인 기여에 불만을 터트린 것이다. 그는 “‘우리는 당신들과 함께 한다’고 말하지만 그럴 정치적 의지가 과연 있는가? 우리는 목숨을 걸고 자유를 위해 싸운다. 당신들도 그런가”라고 했다.
폴란드와 발트해 3국 등 러시아에 강경한 나라들만 독일을 비판하지 않는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 주 EU 정상회담 직전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를 은근히 비판했다. “독일이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건 유럽에도 독일에도 좋지 않다”고 말이다.
숄츠 총리 등 독일 당국자들은 그 같은 비판을 반박한다. 독일이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우크라이나를 지원했다고 강조한다. 비록 늦고 마지못한 것처럼 비쳐졌지만 독일은 이달 들어 게파르트 대공장갑차와 IRIS-T 대공미사일등 첨단 무기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했다. 또 추가로 대공미사일 3대 시스템을 추가로 지원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그밖에도 유럽 최대 경제국인 독일은 25일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한 국제회의도 주재하고 있다.
프랑크-발터 슈타인하이머 대통령이 키이우를 방문해 “우크라이나가 드론과 크루즈 미사일, 로켓 공격을 받고 있는 현 단계에서 연대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러시아를 유럽의 일원으로 삼아야 한다는, 러시아는 값싸게 석유와 천연가스를 공급하는 믿음직스러운 나라라는, 유럽에서 전쟁이 재발해선 안된다는, 러시아와 중국 등 권위주의 국가들과의 교역은 지정학과는 무관한 일이라는, 독일의 오랜 입장이 달라진다는 징후는 거의 없다.
독일 국제안보문제연구소 클라우디아 마요르는 독일이 경제적, 심리적 충격을 받아 일종의 정체성 위기에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번영이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 후대가 선대보다 잘 살 것이라는 믿음이 사라진다는 공포가 있다. 실제로 그런 희망은 사라졌다”고 말했다.
함부르크의 노동변호사 출신인 숄츠 총리는 고물가와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힘겨운 겨울을 맞는 독일 유권자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애쓰면서 세상이 달라졌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변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독일의 전문가 울리히 스펙은 “숄츠 총리가 세상이 변했으나 우리가 보호할 것”이라고 말하는 건 미래의 위험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 숄츠 총리는 “획기적 조치”라며 국방 예산 증액을 발표했다. 1000억유로를 투입해 독일군을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으나 여전히 행동은 굼뜨다. 이 때문에 독일 정부가 유럽의 지도력 공백을 채우기 힘들 것이며 모두가 합의하는 일에만 마지못해 가담한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유럽집행위원회 베를린사무국장 야나 푸글리린은 “현재 독일은 팀 플레이어가 아니다. 끌려간다는 느낌이다. 독일의 이익만 내세운다”고 말했다.
독일은 에너지, 무기 구매, 유럽 전체의 부채, 우크라이나 등 여러 사안에서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는다며 프랑스와의 양자회담을 내년 1월로 미뤘다. 폴란드와 발트 3국과는 앙앙불락한다. 푸글리린은 “이탈리아나 스페인과도 마찬가지”라면서 “독일이 유럽에서 떨어져 혼자가 된 느낌”이라고 말했다.
독일마샬재단의 토마스 크라이네-브록호프는 일부 독일에 대한 비판이 일리가 있지만 지나친 대목도 있다고 말한다. 그는 “독일을 비판하는 일이 일상적이 됐지만 독일 내 반발은 거의 없다”면서 폴란드와 헝가리에서는 반 EU 정서를 자극하는 민족주의 포퓰리즘 정치 세력이 독일을 매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와 관련해 독일은 “할 만큼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독일은 일부 첨단무기를 지원하고 있지만 전황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레오파르트 2 탱크와 마르데르 장갑차 등은 지원하길 거부하고 있다. 국제안보문제연구소 마요르는 이들 무기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2월24일 침공 당시의 경계선 너머로 밀어붙이면 러시아의 반발이 있을 것으로 우려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요르와 야당 정치인 노르베르트 뢰트겐은 지도자들이 지나치게 확전을 우려한다면서 러시아의 핵위협에 겁먹은 유권자들이 최근 지방 선거에서 집권 연립정당에 패배를 안겼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독일은 마르데르와 레오파드를 지원하길 거부하는 걸 너머 이를 보유한 다른 나라들이 지원하는 것도 차단하고 있다. 다만 이들 무기를 우크라이나에 소련제 무기를 지원한 나라들에게는 공급하고 있다. 그러나 소련제 무기도 거의 바닥난 지금 이 같은 정책은 무의미하다.
뢰트겐은 숄츠 총리가 무기를 지원했다면 유럽 동맹을 만들어 “러시아에 맞서고 유럽과 서방을 단합시킬 수 있었는데 오히려 분열을 극대화하고 무기 지원을 늦춰 독일의 신뢰도를 떨어트렸다”고 말했다.
이에 맞서 숄츠 총리와 크리스티네 람브레히트 국방장관은 미국 등 현대식 서방 탱크를 지원한 나라가 없다면서 탱크를 운영하려면 훈련하는데 몇 달이 걸린다고 주장한다.
람브레히트 장관은 지난 주 쾨르베르-슈티프퉁 베들린 외교정책 포럼에서 늘 해오던 대로 “우리는 동맹국들과 조율해 필요한 것들을 지원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독일이 서방 무기를 먼저 지원하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슈미트 총리 비서실장은 미국도 우크라이나 지원 무기를 신중히 조절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아날레나 베어복 외교장관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확대를 강조해왔다. 그는 “우크라이나에 제약없이 무기를 지원할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자유도 지키고 있다. 전쟁이 앞으로 몇 년 동안 독일의 정체성, 유럽의 정체성을 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 국민들이 러시아를 적으로 간주하길 꺼린다는 여론조사 결과에 대해 베어복 장관은 “전쟁에 대한 공포”, 높은 전기료에 대한 공포 때문이라고 말했다. 독일은 에너지 가격 상승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950억유로의 보조금을 국민들과 기업들에 지원한데 이어 2000억 유로를 추가 투입하겠다고 일방적으로 결정했다.
이 같은 액수는 과도한 것이어서 프랑스와 스페인 등도 에너지 보조금 지원 계획을 발표해야 했다. 다른 가난한 나라들의 지원 규모는 보잘 것 없는 수준이다. 미국 학자 대니얼 해밀턴은 “다원주의를 강조해온 독일이지만 에너지 정책은 일방적”이라며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가 핵발전을 포기하고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를 우회하는 노르트 스트림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건설한 것을 지적했다. 해밀턴은 “2000억 유로라는 막대한 금액을 유럽과 협의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발표한 건 매너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울리히 스펙도 “유럽 차원을 들여다 보지 않은 건 큰 실수다. 이웃을 짓밟는 이기주의적 대국이라는 독일의 이미지를 상기시켰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