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면역세포가 통증까지 조절한다면 믿을 수 있을까. 백혈구의 일종으로 알려진 ‘조절T세포(Tregs)’가 염증을 억제하는 것뿐 아니라, 신경세포에 직접 작용해 통증을 줄이는 역할까지 수행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이같은 작용이 암컷 생쥐에서만 확인된 만큼 특정 성별을 대상으로 한 새로운 통증 치료법이 개발될 수 있을 지 주목된다.
4일 학계에 따르면 UC 샌프란시스코(UCSF) 연구팀은 조절T세포가 암컷 생쥐의 통증 민감도를 낮추는 역할을 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특히 조절T세포가 기존에 알려진 염증 완화 뿐만 아니라, 신경계의 진통 수용체에 직접 작용하는 경로를 통해 통증을 줄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연구결과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게재됐다.
복잡한 인체 활동을 단순화해보면 조절T세포와 같은 백혈구는 일반적으로 우리 몸 속에서 병균과 싸우는 전사와 같은 이미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조절T세포는 백혈구이긴 하지만 전사보다는 ‘의사’에 가깝다.
조절T세포는 병원체 침입에 대한 초기 면역 반응으로 나타나는 염증을 조절하고, 손상된 조직의 회복을 유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또 과도한 면역 반응을 억제해 면역세포들이 되려 인체를 공격하는 자가면역 반응도 방지해줄 수도 있다.
그만큼 조절T세포는 백혈구의 일종이지만 염증을 억제하고 다른 면역세포를 조절하는 식으로 통증 완화에 ‘간접적’으로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몸이 다치거나 아플 때 백혈구를 비롯한 체내 면역 시스템이 활성화되고 그 반응의 결과로 염증 등이 나타나게 된다. 이 염증 반응으로 나타나는 매개물질들이 신경을 자극해 통증을 느끼게 하는데, 조절T세포가 과도한 염증 반응을 막아 통증을 줄여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연구 결과 조절T세포가 단순히 염증 완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신경세포의 진통 수용체 자체를 자극함으로써 통증을 직접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연구진은 뇌와 척수를 감싸는 막인 ‘뇌척수막(meninges)’에 존재하는 조절T세포에 주목했다. 이 부위의 조절T세포는 다른 신경계 조직보다 훨씬 밀도가 높다.
이에 연구진은 디프테리아균 독소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유전적으로 조작된 생쥐 모델을 이용해 뇌척수막 속 조절T세포만 선택적으로 제거하는 방식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연구진은 통증 민감도를 확인하기 위해 유연성이 각기 다른 일종의 ‘촉각 자극용 섬유’로 생쥐의 발바닥을 눌러 통증 반응을 측정했다. 생쥐가 더 뻣뻣한 섬유에 반응해 발을 움직인다면 그만큼 통증 자극에 덜 민감하다는 것을 뜻한다.
실험 결과 암컷 쥐에서는 뇌척수막 속 조절T세포를 제거했을 때 통증 민감도가 급격히 높아졌다. 반면 수컷 생쥐는 동일한 실험에서도 변화가 없었다. 또 열이나 냉기 같은 통증이 아닌 자극에 대한 반응은 암수 모두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반대로 조절T세포 수를 늘리자 통증을 줄어드는 효과도 암컷 쥐에서만 나타났다. 연구진이 신경 손상으로 통증 민감도가 높아진 쥐에게 면역 단백질인 IL-2를 주사해 조절T세포를 증가시키자 통증 과민반응이 줄었다. 이 경우에도 수컷에서는 별다른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연구진은 암컷 생쥐만 통증 민감도 변화를 보이는 것에 주목해 암컷 생쥐의 난소를 제거하거나 여성호르몬 에스트로겐의 작용을 차단하는 약물을 투여하고 실험을 반복했다. 이처럼 여성호르몬 작용을 억제한 경우에는 IL-2를 투여해도 조절T세포가 통증을 줄이지 못했다.
여성호르몬이 T세포의 통증 억제 기능을 활성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방증이다.
앞서 다른 연구에서는 조절T세포가 ‘엔케팔린’이라는 천연 진통 물질을 분비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 연구진은 이번 연구에서 엔케팔린의 분비 사실을 재확인했다.
유전자 조작 줄기세포를 이용해 엔케팔린을 생성하는 세포만 선택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생쥐를 제작한 뒤 독소를 주입하자 조절T세포 수가 줄고 통증 민감도는 다시 상승했다. 이는 조절T세포가 단순한 염증 조절만 하는 게 아니라 신경계 진통 수용체를 자극해 통증을 직접 억제한다는 메커니즘을 뒷받침한다.
연구를 이끈 UCSF의 앨런 바솜 교수는 “이번 연구는 조절T세포가 염증 조절이나 조직회복과는 독립적으로 직접 신경을 통해 통증을 조절하는 방식을 명확히 보여준다”며 “특히 여성에게 높은 비율로 나타날 수 있는 만성 통증 치료에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조절T세포 기반 면역 치료법은 이미 자가면역질환 분야에서 임상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연구진은 현재 진행 중인 조절T세포 주입 치료나 IL-2 기반 치료법이 통증 분야에도 확장될 수 있을지 지속적으로 연구를 진행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