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대통령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격을 처음으로 ‘제노사이드(genocide·집단학살)’로 묘사한 뒤 하루 만에 수습에 나선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13일 미국 워싱턴포스트(WP) 등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은 전날 아이오와 연설에서 “가계 예산, 자동차 연료를 채울 돈이 독재자가 벌인 전쟁과 지구 반대편 집단학살 영향을 받아선 안 된다”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격을 처음으로 집단학살로 묘사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연설 후 취재진에게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인이란 생각조차 말살하려 한다는 게 분명해지고 있다. 증거가 늘어나고 있다”며, 집단학살 묘사 이유를 설명했다.
이후 바이든 대통령의 집단학살 발언이 신중하지 못했다는 논란이 일자 백악관은 하루 만에 수습에 나섰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13일 정례브리핑에서 “(실제 규정에는) 법적 절차가 있다”며 “(바이든 대통령은 절차를) 앞서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또 “대통령이 느낀 것을 말한 것”이라면서 “이제 정책 변화라거나 누군가를 혼란스럽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일축했다.
백악관이 바이든 대통령의 발언 관련 정책적 변화는 없다는 점을 강조한 건 ‘제노사이드’라는 용어가 국제사회에서 갖는 무게 때문이다.
‘제노사이드’는 1948년 나치 독일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폴란드계 유대인 제안으로 고안된 용어다. 1948년 제정된 유엔 집단학살협약에선 제노사이드를 “국가, 민족, 인종, 종교 집단을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파괴하는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다.
해당 행위에는 전체 또는 부분에 대해 물리적 파괴를 가져올 목적으로 살해 및 심각한 정신적·신체적 위해를 가하는 행위를 포함하며, 출산 방해나 강제 낙태 등도 해당한다.
정치적 신념에 의한 박해는 해당하지 않으며, 무력 충돌에서 발생한 범죄에만 적용되는 전쟁범죄와도 구별된다.
학계에서 광범위하게 인정한 20세기 이후 발생 대량 학살 사건은 최소 3건으로 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튀르크의 아르메니아 학살사건, 2차 세계대전 나치 독일의 유대인 등 학살사건, 1994년 르완다 후투족의 투치족 학살사건 등이다.
일부 학자들은 1930년대 스탈린에 의한 우크라이나 기근, 1970년대 캄보디아 킬링필드, 1975년부터 1999년까지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점령 기간 인구 25% 사망 사건, 미얀마의 로힝야족 탄압 등도 대량 학살로 보고 있다.
제노사이드로 규정되면 가해자는 특별 재판소에서 형사 재판을 받게 된다. 르완다 사건 관련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의해 설립된 법정은 40여명에 대해 대량 학살 관련 혐의로 유죄를 선고한 바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제노사이드 인정이 특히 중요한 건 대량 학살 인정 시 각국의 우크라이나 지원 정도가 달라지는 데 있다. 대량학살을 인정할 경우 국제사회에는 희생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일종의 책임과 의무가 주어진다.
특히 바이든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에 군사적으로 개입하지 않겠다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만큼, 대량 학살 인정 시 기존 방침을 변경해야 하는 압박을 받을 수 있다. 백악관이 “정책적으로 변하는 건 없다”고 수습한 것도 이 때문으로 풀이된다.
여기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집단 학살 인정이 국제사회에 자리 잡을 경우, 러시아와 이해관계 등으로 우크라이나 지원에 소극적인 국가는 더욱 압박받게 될 전망이다.
특히 러시아에 천연가스 수입 55%를 의존하고 있는 독일을 비롯해 러시아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일부 유럽 국가들은 우크라이나에 무기 지원과 대러 제재에 지금보다 더 적극적인 동참을 요구받을 수 밖에 없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이날 프랑스 공영방송과 인터뷰에서 집단학살 표현을 거부한 배경에도 이 같은 점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유엔 집단학살에 관한 협약상 체결국은 집단 학살을 방지하고, 국제법상 가해자를 처벌할 의무가 있다. 2019년 7월 기준 전 세계 152개 국가가 체결한 상태로, 독일·프랑스 등도 포함된다.
비정부기구 ‘제노사이드 워치’의 그레고리 스탠턴 대표는 폴리티코에 “제노사이드는 강력한 단어”라며 “제노사이드 선언은 전쟁범죄나 인도주의 범죄보다 국가에 더 큰 의무를 부여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