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6일(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UAE)와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2개국 순방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서방의 러시아 고립 시도가 실패하고 있다는 반증이란 평가가 나왔다.
오히려 푸틴 대통령은 중동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과시하면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중재자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또 중동 주요 산유국들과 OPEC+에서 공조를 강화하기로 하면서 세계 에너지 시장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재확인했다.
경제·무역·투자 등 양자 관계 강화와 OPEC+ 공조, 그리고 러·우 전쟁과 이·팔 전쟁 등 국제 정세 등이 의제였다.
러시아 대표단엔 엘비라 나비울리나 중앙은행 총재, 알렉산드르 노바크 에너지 담당 부총리, 데니스 만투로프 산업통상부 장관 등 고위 당국자들이 포함됐다. 체첸 지도자 람잔 카디로프도 동행했다.
푸틴, 美와 긴밀한 UAE서 예포로 환영 받아…초상화 선물
타스, 리아노보스티 통신과 AP, 알자지라 등 외신들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이날 하루 일정으로 UAE에 이어 사우디를 잇달아 실무 방문했다.
푸틴 대통령은 먼저 UAE 아부다비를 찾아 카사르 알 와탄 대통령궁에서 셰이크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 나하얀 UAE 대통령과 회담했다. 아부다비에선 현재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가 열리고 있다.
푸틴 대통령의 전용기는 이날 오전 수호이(Su)-35 전투기 4대의 호위를 받으며 아부다비 공항에 착륙했다. 아부다비에는 미군의 주요 허브인 알다프라 공군기지가 있다.
UAE 측은 예포 21발을 발사하고 군용기로 상공에 러시아 국기 색깔을 수놓으며 그를 맞았다. UAE는 미국의 동맹국이지만, 러시아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셰이크 무함마드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을 “친애하는 친구”라고 부르면서 “다시 만나 기쁘다”고 환영했다. 그는 나중에 성명에서 “안정과 발전을 보장하기 위해 대화와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푸틴 대통령도 “러시아와 UAE 관계가 전례 없이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면서 “UAE는 아랍 세계에서 러시아의 주요 무역 파트너”라고 화답했다.
푸틴 대통령은 셰이크 무함마드 대통령을 그린 초상화를 선물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외교 의례에 따른 선물 교환”이라면서 “푸틴 대통령은 모자이크를 선물 받았다”고 밝혔다.
You just have to watch how Putin was greeted in the UAE and Saudi Arabia on his current Middle East visit to understand that the petrodollar is history and that the multipolar order is taking over. The Pentagon media calls Putin “Internationally isolated”.pic.twitter.com/8o8nX68bQJ
— Kim Dotcom (@KimDotcom) December 6, 2023
사우디 왕세자와 4년 만에 대좌…OPEC+ 공조 및 중동 정세 논의
푸틴 대통령은 이어 사우디로 이동해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왕세자와 확대 회담과 만찬을 함께 했다. 이들이 대면으로 만난 것은 2019년 10월 이후 4년여 만이다.
푸틴 대통령은 “양국은 경제를 포함해 모든 분야에서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면서 “지도자들이 역내 상황에 대해 정보와 평가를 교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러시아와 사우디 협력이 중동 안보 강화에 도움이 됐다”면서 “향후 정치적 교류는 글로벌 상황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호응했다.
페스코프 대변인은 양국 정상이 경제, 투자, 문화, 에너지 시장 협력, 중동 정세 등에 대해 논의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OPEC+ 내 협력에 대해 논의했다고 했다.
OPEC+는 사우디 주도의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 등 비(非)OPEC 주요 산유국들이 모인 협의체다. OPEC+는 지난달 30일 장관급 회의에서 내년 1분기 석유 생산량을 하루 220만 배럴씩 자발적으로 줄이기로 합의했다. 그럼에도 국제 시장은 추가 감산에 의구심을 품고 있고, 국제 유가는 며칠 사이 계속 하락하고 있다.
페스코프 대변인은 “양측은 국제 에너지 시장을 적절한 수준에서 안정적이며 예측 가능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러시아와 사우디가) 큰 책임을 갖고 있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면서 “이러한 협력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하마스 전쟁 국제 정세에 대해서도 논의했다고 부연했다. 페스코프 대변인은 “양국 정상은 (확대회담 뒤) 통역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여기서 무엇이 논의됐는지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이-팔 전쟁과 민감한 다른 국제 문제들을 논의한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UAE와 사우디는 이-팔 전쟁을 중재 중인 핵심 당사자들이다. 푸틴 대통령은 이들 국가 정상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아울러 푸틴 대통령은 무함마드 왕세자를 러시아로 초청했다.
당초 이번 회담은 러시아에서 열릴 것으로 예상됐지만 ‘특정 상황’으로 변경됐다고 한다. 이에 푸틴 대통령은 원래 계획했던 UAE를 방문하면서 사우디까지 순방하는 것으로 일정을 조정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와 관련 “그 어떤 것도 양국 우호 관계 발전을 방해할 수는 없다”면서 “다음 회담은 모스크바에서 열자”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무함마드 왕세자도 “우리는 준비돼 있다”며 동의했다. 구체적인 방문 시기는 추후 외교 채널을 통해 협의하기로 했다.
푸틴, 중동 영향력 과시…”대러 고립 실패 반증”
외신들은 푸틴 대통령의 이번 중동 순방은 세계 무대에서 존재감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알자지라는 “이번 회담은 석유 협력과 함께 이-팔 전쟁을 의제 삼아 중동에서 더욱 영향력 있는 역할을 모색하려는 러시아 노력의 일환”이라면서 “러-우 전쟁과 관련해 제재로 러시아를 고립시키려는 서방의 시도가 실패했음을 보여주려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다”고 평가했다.
또 “푸틴 대통령은 아부다비에 와서 상당히 기뻐하는 것 같다. 다만 UAE는 미국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 이번 방문이 미국에서 어떻게 보여질지는 불분명하다”고 덧붙였다.
푸틴 대통령은 이-팔 전쟁은 “미국 외교의 실패”라고 비난해왔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모두와 우호적인 러시아가 중재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자임했다.
AP통신은 “주요 안보 파트너로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UAE와 러시아의 이번 회담은 서방의 대러 제재 강화 이후 러-UAE의 경제 관계가 확대됐음을 강조한다”면서 “전문가들은 UAE는 러시아가 제재를 회피할 수 있는 핵심 통로라고 말한다”고 했다.
푸틴 대통령이 UAE와 사우디를 방문한 것은 코로나19 팬데믹 전인 2019년 10월 이후 4년 만이다. 걸프 지역 방문은 지난해 7월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리 알리 하메네이를 만난 이후 처음이라고 알자지라는 전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3월 국제형사재판소(ICC) 체포영장이 발부된 이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중국 등 일부 국가만 방문하고 해외 방문을 자제했다. 사우디, UAE도 이들 국가와 마찬가지로 ICC 미가입국으로 푸틴 대통령을 체포할 의무가 없다.
한편 푸틴 대통령은 7일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과 회담하며 외교 행보를 이어갈 예정이다.
또 UAE는 8~9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을 맞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