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정부는 최고의 극진한 예우로 그의 유해를 맞았다. 그가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패시킨 무장독립운동가였다는 것 외에 아는 2게 별로 없어 구글링해서 검색해 보며 무장독립운동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우선 청와대가 “독립전쟁”의 첫 승리라고 부르는 봉오동 전투의 전과는 많이 과장된 듯하다.
공식 역사에 나오는 전과는 상해 임시 정부 군무부가 발표한 것으로 아래와 같다.
일본군 전사자 157명, 부상자 300명
독립군 전사자 4명, 부상자 2명
그러나 일본 사료를 통해 교차검증했다는 한 블로거의 주장을 간략히 소개하면,
- 전투에 참여한 일본군 총병력의 숫자를 부풀리고 있다. 당시 출동했던 일본군 총병력은 270명을 넘지 않는다. 우리측 전과에 따르면 총 일본군 숫자가 457명이 된다.
- 독립군이 사살한 일본군은 1~49명 정도다. 일본군 측에서 보고한 것은 1명이다. 전투 중에 일본군끼리 오인사격이 있었다. 나머지는 아마도 오인사격으로 생긴 사망자 수일 것이다. 또한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진 군인들 중에 봉오동 전투 때 죽은 군인은 없었다.
- 독립군 측 피해는 축소되었다. 홍범도의 지휘를 거부하고 교전에 참가했던 독립군의 한 분파 소속 8명은 모두 전사했다.
봉오동 전투의 전과가 과장되었어도 독립군이 승리했음은 대부분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은 다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다른 관점에서 봉오동 전투를 과연 승리라고 쉽게 이야기하는 것에 회의적이다. 이는 민간인 피해가 많았기 때문이다.
임시 정부 보고는 아예 일반 양민 사상자 수는 포함하지 않고 있다. 일본측 사료에 따르면 봉오동전투에서 어린이까지 합쳐 양민 24명이 죽었다. 적지 않은 피해다. 이들까지 포함하면 나에겐 양측의 피해가 비슷했다고 보인다. 봉오동 전투가 없었다면 이 민간인들은 농사지으며 별 걱정없이 지냈을 것이다. 그들은 만주에 정착하여 조선인 촌을 형성하여 평온하게 살던 농민들이었다. 독립군은 이들을 피난시키지 못하고 자기들만 퇴각했다. 남은 한인들은 어쩌란 말인가. 일본군은 마을 사람들을 보복 사살한 것으로 보인다.
전투를 하려면 식량, 의복, 무기 등과 같은 보급물자가 필요하다. 주둔하고 있는 곳에서 물자지원이 없으면 군대는 유지되지 못한다. 그래서 당시 일본군은 독립군을 후방에서 지원한다고 의심가는 한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사살하였다. 봉오동 전투 몇 달 후에 마적단의 훈춘 일본 영사관 공격 사건과 청산리 전투가 있자 일본군은 만주 지역 독립군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일반 농민인 한인들 수천 명을 살상하였다(나무위키 참조). 내가 보기에 이는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었다.
결국 봉오동 전투 이후 1년 쯤 되어 무장 독립군은 군대유지에 필요한 보급지원을 해줄 한인촌들이 거의 쑥대밭이 되자 연해주 쪽으로 쫓겨 가게 된다. 그리고 연해주에서 유명한 ‘자유시 참변’이라는 독립군 학살극이 일어났다. 이 비극 역시 굶주린 무장 독립군과 이들에게 식량 뺏기길 거부하는 가난한 러시아 농민들 사이의 갈등이 원인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 이후 무장 독립군은 거의 해체되었고 홍범도는 무장해제 당하고 러시아 연해주에 남는 길을 택했다. 그때 그의 나이 53세였다.
봉오동 전투 이후 1년 정도의 기간에 여러 전투와 참변들이 있었고 결국 만주 독립군은 와해되었다. 그 사이 최소 수천명 이상의 무고한 민간인들이 희생당했다. 이것은 승리인가 패배인가?
만주 땅에서 싸우면서 그곳에 정착해 살던 한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무장투쟁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회의가 든다. 또한 어느 나라도 자기 영토에 무장한 이민족을 원하지 않는다. 나라없는 민족의 삶의 현실이다.
그리고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한 100년 전 사진 속의 독립군. 무장한 그들은 집신을 신고 있었다!
본토(한반도)도 뺏긴 현실에서 이제 무모한 도전으로 만주에 살던 한인들의 삶도 파괴해버렸다. 그런데 비극으로 끝난 무장투쟁을 성스러운 성전으로 만드는 정부의 역사만들기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였던 김학철은 독립운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우리의 독립운동사는 신화에 가까울 정도로 과장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해요. 때로는 민족의 자존심을 고취하기 위해 신화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겠지요. 그러나 과장과 인위적인 조작을 통해 과거사를 미화시키는 작업에서 벗어날 때가 된 것 같아요. 이제는 역사와 전설을 구분해도 좋을만큼 이 사회가 성숙하지 않았습니까? (중략) 내 경험으로 볼 때 봉오동 전투나 청산리 전투에서의 전과는 적어도 300배 이상 과장된 것이예요. 우리의 항일무장투쟁은 악조건 속에서 살아남은 정신의 투쟁이지 대첩이나 혁혁한 전과는 불가능한 전력이었어요. 일본과 맞닥뜨렸을 때 열에 아홉 번은 졌어요. 어쩌다가 한 번 ‘이긴’ 경우도 일본군 서너 명 정도 사살하면 대전과로 여겼어요. 한마디로 말하자 면 윶진 아비 마냥 자꾸 지면서도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는 날까지 계속 달려든 것입니다. 그 불굴의 정신만은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학철은 최종적으로 “불굴의 정신”에 높은 가치를 두었다. 그는 끝내 마르크스주의를 버리지 않았는데 죽을 때까지 이 ‘불굴의 정신’을 앞세우며 어떻게 유물론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 평생 남았는지 신기하다.
🔺 김은희 교수는 서울대 의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문화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한국학 중앙연구원 전임 연구원으로 재직하며 일제시대의 가족변화에 관한 연구프로젝트를 수행한 바 있다. 주요 논문으로 “From Gentry to the Middle Class: The Transformation of Family, Community, and Gender in Korea”(박사학위논문), 「도시 중산층의 핵가족화와 가족 내 위계관계 변형의 문화적 분석」(『한국문화인류학』, 1995), 「문화적 관념체로서의 가족: 한국 도시 중산층을 중심으로」(『한국문화인류학』, 1995), “‘Home is a Place to Rest’: Constructing the Meanings of Work, Family and Gender in the Korean Middle Class”(Korea Journal, 1998), “Mothers and Sons in Modern Korea”(Korea Journal, 2001), 「대가족 속의 아이들: 일제시대 중상류층의 아동기」(『가족과 문화』, 2007) “도시 중산층 기혼여성의 취업과 부부 역할:’자기 일’의 정치학”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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