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우리는 ‘간절한 맘’으로 누군가 나타나 대한민국의 이 난국을 평정해주고 구원해주기를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나는 대통령이 나라를 구원해주길 바라는 이 ‘간절한 맘’이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대통령 후보들은 국민들이 듣고 싶어하는 달콤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곧 낙원이 올 것이라는…
그러나 정치인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해주는 선지자가 아니다. 세상살이에서 받은 상처를 정치인에게서 위로받으려고 하지 말자. ‘사람이 먼저다’ 이런 따스한 말 기대해서도 안된다. 나는 국민을 위로하고 사랑하는 것은 정치인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통령은 국민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어버이’가 아니고 종교지도자도 아니다. 국민은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구원’을 찾아 나서야 한다. 종교를 갖든지, 연예인 덕질을 하든지, 운동을 하든지, 가족을 혹은 애인을 사랑하든지… 이게 사생활이고 자유이다. 그리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이 소중한 사생활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국가는 종교집단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다.
그래서 이재명의 출사표를 냉정하게 읽어보았다.
“모두 함께 잘사는…”, 참으로 가슴 뛰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다’ 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비전의 제시가 허망한 말이 될 수 밖에 없음을 이제는 깨닫는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정권들 모두, 하나의 예외도 없이, 개혁을 앞세웠고 모든 문제를 일시에 해결하겠다고 나섰다. 캐치프레이즈만 달랐을 뿐… ‘구악을 일소하겠다’, ‘부정부패를 척결하겠다’, ‘재벌을 개혁하겠다’, ‘적폐를 청산하겠다’, 모두 한결같이 공언하였다. 이번에는 빈부격차를 없애겠단다. 모두가 잘사는 대동세상을 만들겠단다.
“특권과 반칙에 기반한 강자의 욕망을 절제시키고
약자의 삶을 보듬는 억강부약정치로
모두 함께 잘사는 대동세상을 향해 가야 합니다.”
위에 인용한 “대동세상”은 유교적 이상향 그대로이다. 공자 이래 2000 년 이상이 지났어도 이루어지지 못한 꿈의 사회이다. 조선은 그 꿈을 곧이 곧대로 실현하려다 너무 가난해지고 약해져 남의 나라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재명은 5년 안에 실현하겠단다. 어떻게?
간략히 요약하면, 이재명은 우리나라 위기의 원인은 불공정과 양극화라고 진단한다.
불공정과 양극화는 저성장으로 이어지고 저성장은 기회빈곤을 가져오고 기회빈곤은 저출생, 고령화, 실업, 갈등과 균열, 사교육, 입시지옥 등등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의 원인이다.
그래서 승자만 생존하는 무한경쟁 약육강식이 일상화되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공정성만 확보하면 희망과 성장이 가능해진다. 공정성을 어떻게 확보하겠다는 건지는 설명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경제적 기본권을 보장하여 모두가 최소한의 경제적 풍요를 누리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나는 우선 이재명의 경제이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경제관에 대해선 아마 경제학자들이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또한 그가 지적한 한국사회의 많은 문제들은 문화구조와도 얽혀있어 순수 경제이론 만으로 해결될 것 같지도 않고 여기서 논의하기에 너무나 큰 주제들이다. 그래도 나를 정말 걱정시키는 것 몇 가지는 지적하고 싶다.
- 그는 사유재산권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는 듯하다. 그가 서술한 “국가의 존재 이유”에 따르면, 국가는 “더 안전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존재하고 정치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재산’이 빠져 있고 대신 ‘더 나은 삶’이라는 애매모호한 용어가 들어가 있다. 근대 사회에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은 국가가 존재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국민에게 많은 고통을 주는 이유도 ‘재산’에 대한 인식과 관련되어 있다. 재산을 증식하는 행위는 국민의 기본권이다. 이 재산권을 존중하지 않으니 그의 주택정책의 방향 역시 현 정부와 별 차이 없다. 정부가 기본적인 주택은 공급해줄테니 ‘투기’하여 ‘부당이익’ 챙기면서 재산 불리는 건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 그는 정책수행에 있어 ‘강력한 추진력’을 자랑한다. 그런데 잘못된 이론에 근거해서 강력하게 밀고 나갈 때 나라는 어찌 될 것인가? 나아가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과정에 개인의 인권과 사유재산권이 얼마나 지켜질 것인지도 염려된다. 그가 사유 재산이 국가의 보호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 않기에 더욱 걱정이다.
- 강력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산업구조를 재편하겠다고 한다. 박정희, 전두환, IMF 경제위기 때를 상기시킨다. 70년대, 80년대 당시 우리나라 민간경제규모가 작았고 정부가 육성하고자 하는 분야가 워낙 어마어마한 규모의 투자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정부가 대기업을 지원할 수 밖에 없었다. 예컨대 위험부담이 엄청난 조선업이나 다른 중화학 공업에 어느 민간 기업이 투자하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IMF 때와 같은 경제위기도 아니다. 왜 산업구조를 국가가 재편해야 하나? 그것은 계획경제와 비슷하다. 잘못된 판단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5년 임기의 대통령이?
- 산업구조를 재편하는 데 있어 문화컨텐츠 강화를 위해 문화예술 분야에 지원을 확대하겠다고 한다. 나는 문화예술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최소한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처럼 정치가 모든 분야를 지배하고자 하는 사회에서 잘못하면 문화예술이 정치이념에 종속되어 집권세력에 봉사하는 공공예술로 전락하는 길을 가게 된다. 극장국가가 한반도 남쪽에도 탄생될 수 있다. 이 점이 가장 걱정된다.
결론적으로, 만약 이재명 정부가 들어서 그의 생각대로 정책이 실행된다면 우리 사회의 민간부문은 자율성을 잃고 더욱 더 쪼그라들 것 같다. 산업구조의 재편이라는 명분으로 정부가 어떤 기업은 살리고 어떤 기업은 죽일 것인지 정할 것이다. 정치권력이 무서우니 당연히 정경유착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우리나라 상장기업에 국민을 대리하여 투자하고 있는 국민연금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운용될 것이다. 한전의 부실기업화에서 볼 수 있듯이 재벌 기업 못지 않게 정부가 소액 주주들의 이익을 침해하게 될 것이다.
반면 국가권력이 지배하는 공공부문은 거침없이 비대해 질 것이다. 문화컨텐츠 사업까지 관리하게 될 것이니까.
🔺 김은희 교수는 서울대 의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문화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한국학 중앙연구원 전임 연구원으로 재직하며 일제시대의 가족변화에 관한 연구프로젝트를 수행한 바 있다. 주요 논문으로 “From Gentry to the Middle Class: The Transformation of Family, Community, and Gender in Korea”(박사학위논문), 「도시 중산층의 핵가족화와 가족 내 위계관계 변형의 문화적 분석」(『한국문화인류학』, 1995), 「문화적 관념체로서의 가족: 한국 도시 중산층을 중심으로」(『한국문화인류학』, 1995), “‘Home is a Place to Rest’: Constructing the Meanings of Work, Family and Gender in the Korean Middle Class”(Korea Journal, 1998), “Mothers and Sons in Modern Korea”(Korea Journal, 2001), 「대가족 속의 아이들: 일제시대 중상류층의 아동기」(『가족과 문화』, 2007) “도시 중산층 기혼여성의 취업과 부부 역할:’자기 일’의 정치학”등이 있다.
🔺 실린 김은희 교수의 글의 저작권은 전적으로 김은희 교수에게 있습니다. 무단전재는 저작권법에 위배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