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별세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은 ‘여성최초’ 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니는 ‘진보 진영의 아이콘’이다.
미국 역사상 연방대법관에 오른 두 번째 여성 대법관으로 임명된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여성 최초로 불리며 역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1981년 샌드라 데이 오코너 대법관이 여성 최초 대법관)
어려운 가정환경속에서 긴즈버그 대법관은 전액 장학금으로 코넬대에 입학했고, 1956년 하버드 로스쿨에 들어갔다. 당시 하버드 로스쿨에는 500명 재학생중 여성은 단 9명 뿐이었다.
코넬대에서 만난 남편 마틴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딸을 돌보며 학업을 이어가며 이미 이때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뉴욕으로 이주하면서 컬럼비아 로스쿨로 옮겼으며 탁월한 성적으로 수석 졸업했다.
이후 ‘여성최초’의 발자취가 시작된다.
그 는 럿거스 대학의 법학 교수로 첫 커리어를 시작했고, 자신의 월급이 남성 동료보다 낮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다른 여교수들과 함께 ‘동등한 임금’ 운동에 나서 여성 교직원의 급여 인상이라는 성과를 이뤄냈다. 여성 최초다.
이후 1972년에는 여성 최초로 모교인 컬럼비아 로스쿨의 교수가 됐다.
성 평등, 여성권익 신장 등으로 여성 인권운동을 이끌고 각종 소송을 주도하기도 했다.
민주당 지미 카터 대통령 시절인 1980년 연방 항소법원 판사로 임명됐고, 1993년에는 빌 클린턴 대통령의 지명으로 대법관에 올랐으며 그렇게 27년간 대법관으로 연방 대법원을 지켰다.
동성결혼 합법화, 버지니아 군사학교의 여성 입학 불허에 대한 위헌 결정, 동일노동 동일임금 지급 등의 판결을 내리며 여성의 지위 향상에 기여했다.
항상 약자 편에서 소수 의견을 대변하면서 연방대법원에서 중심을 잡았고, 젊은이들은 RBG라는 애칭을 붙이며 응원했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하급심에 지침을 제시하는 명확한 의견을 남겨 ‘판사의 판사’라는 명성도 얻었다고 CNN은 전했고, 2015년에는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100명의 영향력 있는 인물에 포함됐다.
여러차례 암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극복해 냈고, 투병중에서도 공개변론 일정에는 한번도 빠진적이 없다.
생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했고 자신이 은퇴하면 연방대법원이 우경화된다며 늘 우려했던 것으로도 전해졌다.
그녀의 발자취는 이미 세상을 떠나기 전부터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줬다.
로스앤젤레스 인근 스커볼센터에서는 지난 2018년 긴즈버그의 전시회가 마련돼 그녀의 어린시절부터의 발자취를 조명했고, 앵콜 전시로까지 이어진 바 있다.
이수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