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근로자가 일과 가정 사이에서 여러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느끼는 갈등이 클수록 우울증 위험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정신건강의학과 한규만 교수팀(고려대 의대 졸업생 이지승·임지은·조송희 학생(공동1저자)은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서 시행한 2018년 여성가족패널조사(KLoWF) 자료를 이용해 19세 이상 여성 근로자(자영업자 및 무급 가족 근로자 포함) 4714명을 대상으로 직장과 가정에서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느끼는 갈등의 정도와 우울증 간 상관관계를 분석한 결과 이같이 확인됐다고 29일 밝혔다.
연구팀은 여성 근로자들이 직장과 가정에서 여러 역할(아내·어머니·딸인 동시에 팀장)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겪는 심리적 갈등 수준을 7문항의 설문지로 평가했다. 전체 표본에서 상위 25%에 해당하는 점수를 보인 경우 높은 수준의 일과 가정 사이에서의 갈등이 있는 것으로 정의했다. 우울증의 경우 역학 연구에서 널리 쓰이는 9문항의 한국판 PHQ-9 설문지를 이용해 평가했다.
연구 결과, 높은 수준의 일-가정 갈등을 느끼는 여성 근로자는 낮은 수준의 일-가정 갈등을 느끼는 근로자에 비해 우울증을 경험할 위험이 2.29배 높았다.
또 높은 수준의 일-가정 갈등과 우울증 간 상관관계는 20~30대의 젊은 여성, 교육수준이 높은 여성, 소득이 높은 여성, 1명의 자녀가 있는 여성, 비정규직 여성 근로자,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여성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특히 일-가정 갈등으로 인한 우울증 위험이 50·60대 여성 근로자에서 각각 2.32배, 1.87배 높아진 반면, 20~30대 여성 근로자의 경우 3.78배에 달했다.
한 교수는 “20~30대 젊은 여성 근로자들은 직장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가정과 직장에서의 역할 갈등을 다루는데 필요한 노하우나 스킬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며 “특히 직장에서는 새로운 역할을 배우고 하급자로서 일하면서 많은 직무 스트레스를 겪을 뿐 아니라, 동시에 육아와 관련한 스트레스가 매우 클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어린 자녀를 둔 여성 근로자에서는 일-가정 갈등이 매우 실질적인 스트레스 요인이 될 수 있다”면서 “MZ세대로 대변되는 20~30대 여성 근로자들은 이중고를 겪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구팀에 따르면 교육수준이 높고, 소득이 높은 여성 근로자에서 일-가정 갈등에 따른 우울증 위험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가사 부담에도 불구하고 직무를 완벽하게 수행해야 된다는 심리적 부담을 더 많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교육 수준이 높고, 소득이 높은 여성 근로자들은 직장 내에서도 관리직이나 전문직에 종사할 가능성이 높고 이 경우 직무에 대한 책임성도 높아진다.
서비스직 종사자나 비정규직 근로자가 일-가정 갈등에 따른 우울증의 위험으로부터 취약한 것은 일-가정 갈등 외에도 감정노동이나 고용불안정성이라는 심리적 부담을 겪고 있고, 유급 육아휴직이나 유연근무제 같은 정책적 지원을 받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연구팀은 분석했다.
한 교수는 “일-가정 갈등으로 인해 20~30대 여성근로자들이 직장을 그만둬 경력이 단절되게 되면서 생기는 사회경제적 손실도 크다”며 “직장과 가정생활의 공존을 도울 수 있는 유급 육아휴직이나 유연근무제와 같은 정책적 지원을 늘리고, 이런 제도들을 원할 때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가정 친화적 직장 문화를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일-가정 갈등으로 인한 우울증은 업무에 대한 동기 부여나 생산성을 떨어뜨리고 가정에서는 정서적으로 소진되고 무기력해지는 ‘번아웃 증후군’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며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않은 경우 우울증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있어서 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번 연구 결과는 사회과학논문인용색인(SSCI)급 국제학술지 ‘저널 오브 시키애트릭 리서치(Journal of Psychiatric Research)’ 온라인판 최신호에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