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3일(현지시간) 러시아군이 쏜 첫 번째 미사일이 우크라이나에 떨어지면서 유럽은 한 시대의 종말을 맞이했다.
2일 영국 일간 가디언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00일을 맞아 장문의 기사를 실었다. 내용을 요약해 전달하고 영상으로 재구성해 본다.
우크라이나 국경에 집결한 수 천 명의 러시아군은 (침공)명령을 하달 받았다. 키이우와 모스크바에 있던 두 명의 대통령은 그들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연설을 준비했다. 서방 각 나라의 수도에서는 관료들이 유럽 주요 국가간에 30년 넘게 지속된 평화가 종식되는 걸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한 가지 생각도 사라졌다. 교역과 공동 번영을 통해 유럽의 오래된 적대관계를 해소할 수 있다는 생각. 아이폰, 인스타그램과 이케아 가구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이 피의 역사의 원동력이 된 국수주의(쇼비니즘)를 냉각시킬 수 있다는 생각.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으며 침공이 임박했다는 미국의 특별 경고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인들은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서구로 탈출하는 행렬도 없었다. 토요일 밤 키이우의 카페와 술집은 만석이었고 사람들은 휴일, 데이트, 아이들을 위한 수영강습 계획을 짜고 있었다.
볼로디미르 크세니트(22)는 친구들과 함께 밤을 보내며 전쟁 이야기를 나눴지만 “실제로 전쟁이 터질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많은 분석가들도 생각이 일치했다. 국경에 집결한 러시아군은 한 나라를 점령하기엔 규모가 너무 적다. 국영 미디어는 러시아 국민에게 전쟁에 대비하라는 보도를 거의 하지 않았다. 침공이 초래할 보복조치로 인한 경제 붕괴를 감당할 수 있는 지도자는 없다고.
이것은 모두 진실이며 그들은 모두 틀렸다.
■Day 1: 2월 24일 목요일/ 러시아의 침공 시작
우크라이나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는 목요일 이른 시간에 긴박한 뉴스를 전달하려고 TV 앞에 섰다. 정장 차림의 그는 여전히 소년 같았고 구김살이 없었다. 젤렌스키는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행동을 승인했다고 전했다. 그는 유럽 전체가 전쟁 위기에 처했고 “전쟁은 모든 것을 불태울 것”이라고 말했다.
오전 5시30분 러시아 국영 미디어는 대통령 연설로 시작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군사화, 나치화를 막기 위한 “특별 군사 작전”을 선언했다. 몇 시간 뒤 키이우, 하리키우, 오데사, 마리우폴 등에서 폭발이 잇따랐다.
러시아군과 장갑차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18마일(약 29km) 지점까지 접근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흑해를 가로질러 항구에 포탄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러시아 암살조가 젤렌스키를 찾으러 나섰고 대통령 집무실 부근에서 총성이 울렸다. 키이우와 전 세계에 어둠의 기운이 퍼졌다.
■Day 2: 2월 25일 금요일/ 대통령은 여기 있다
키이우는 세 방향에서 공격당했다. 시 곳곳에서 폭발음이 들리고 러시아군이 근접한 북부 소도시에서 시가전이 벌어졌다. 우크라이나 국방장관은 도망가지 않은 사람들은 화염병을 만들어 러시아군에 맞설 준비를 하라고 촉구했다.
유럽이 하나로 연대해 러시아를 은행 결제시스템에서 퇴출시키고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쫓아내는 등 새로운 제재를 부과했다
그날 밤 폭격이 잠시 멈춘 동안 젤렌스키가 나타났다. 그는 키이우의 거리에서 스스로 촬영한 32초짜리 비디오를 공개했다.
■Day 3: 2월 26일 토요일/ 우크라인들의 자원입대 쇄도
드니프로에서 온 역사학도 키릴로 데므첸코도 우크라이나군에 자원하는 젊은이들의 행렬에 함께 했다. 그는 즉각 소총을 받고 수도 외곽 고속도로에 배치됐다.
그가 도착한 뒤 몇 시간 만에 러시아군 부대가 나타나 사격을 시작했다. 그는 살아남았지만 교전 기억은 없고 달아나던 이미지만 남았다.
그는 “전쟁 음악만 기억난다. 폭탄, 소총사격, 대공 미사일 소리 등 짧게 끊긴 디테일만 떠오른다”며 “전생에서 겪은 끔찍한 이야기 같다”고 말했다.
■Day 4: 2월 27일 일요일/ 침공에 맞서다
서유럽으로 향하는 길은 차량으로 꽉 막혔고 이미 30만 명 넘는 우크라이나인이 국경을 넘었다. 그들은 사실상 거의 다 여성과 아이들이었다. 계엄령이 선포돼 18~60세 남성은 국외 탈출이 금지됐다. 나라 전체에 걸쳐 가족, 친구와 연인들이 갈라졌고 일부는 영원히 못 만나게 됐다.
시시각각 유럽의 안보가 무너져 내렸다. 독일은 대전차 무기와 스팅어 미사일을 보냈다.
4일이 지나자 우크라이나는 초반의 충격을 견뎌낸 것처럼 보였다. 젤렌스키는 여전히 살아서 정부를 지휘했다. 러시아군은 제공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연료와 식량 고갈로 진격이 지연되면서 반격이 시작됐다.
부차에서 러시아군 부대가 우크라이나 곡사포 공격에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몇시간 뒤 군인들은 되돌아와 민가를 장악하고 숨었다.
■Day 9: 3월 4일 금요일/ 유럽 최대 원전에서 전투가 벌어지다
유럽 최대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우크라이나 동부 자포리자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원전이 공격을 받아 방사능이 누출될 수 있다는 공포가 확산됐다.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원전 시설 일부에서 화염이 치솟았다. 기적적으로 원자로는 무사했다.
집중 폭격을 받은 마리우폴에서 수백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Day 15: 3월 10일 목요일/ 영국이 재벌 아브라모비치에 제재를 가하다.
영국이 세계 최고 부호 중 한 명이며 첼시 구단을 소유한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재산을 동결하고 입국금지 조치를 내렸다. 런던과 러시아의 ‘더러운 돈’의 오랜 유착관계도 끊겼다.
■Day 17: 3월 12일 토요일/ 수도 키이우, 침공에 대비하다
러시아군의 키이우 진격작전에 제동이 걸렸다. 우크라이나군이 다리를 폭파하고, 댐을 터뜨려 마을을 침수시키는 등의 수법으로 진격로를 막았다. 세계 곳곳에서 지원한 무기로 무장한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에 맞설 수 있는 태세를 갖췄다.
러시아군은 남부 도시 헤르손 공략에 나섰고 이곳은 러시아군이 점령한 첫 번째 도시가 됐다.
■Day 24: 3월 19일 토요일/ 마리우폴 극장 대피소, 미사일 공격을 받다
러시아군은 마리우폴에 집중 공격을 퍼부어 도시 주거시설 80%를 초토화 시켰다. 시 중심으로 진입한 러시아군이 아조우스탈 제철소까지 도달했다.
1300여 명이 대피해 있고 러시아어로 ‘어린이들’이라는 글자까지 써놨던 마리우폴 극장도 폭격으로 파괴됐다.
■Day 26: 3월 21일 월요일/ 세계 식량가격이 치솟다.
러시아군이 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과 오데사에서 전과를 올리면서 ‘유럽의 빵 주머니’ 우크라이나의 밀 수출이 중단됐다. 우크라이나에서 밀 80%를 수입하는 이집트에서 빵 가격이 급등했다. 스리랑카에선 연료가격이 치솟았다. 세계 곳곳에 인플레이션 공포가 확산됐다.
■Day 38: 4월 2일 토요일/ 부차 민간인 학살 ‘전쟁 범죄’ 드러나다
부차 길거리에서 총에 맞아 사망한 채 방치된 민간인 시신들을 촬영한 사진과 영상이 공개됐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대량학살’의 증거라고 말했다.
■Day 54: 4월 18일 월요일/ 러시아, 동부 대공세 시작
러시아군이 동부 돈바스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대공세를 시작했다. 마리우폴의 아조우스탈에서 최후의 저항을 벌이던 우크라이나군은 항복 요구를 거절하고 항전을 지속했다.
■Day 83: 5월 17일 화요일/ 마리우폴 함락되다
우크라이나군이 더 이상 아조우스탈에서 전투를 벌이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최후의 저항군이 항복하고 러시아로 이송됐다. 마리우폴이 러시아군에게 완전히 함락된 것이다.
■Day 97: 5월 31일 화요일/ 러시아, 동부 전투에서 성과
전략을 수정한 러시아군이 세베로도네츠크에 집중 포격을 퍼부어 시의 80%를 장악했다. 공급이 원활한 동부 전투에서 러시아군이 조금씩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Day 100: 6월 3일 금요일/ ‘새로운 국가’의 탄생
젊은 역사학도 데므첸코는 하리키우에 주둔한 병참부대의 병장이 됐다.
그는 “다른 지역에서 다른 직업을 갖고 살던 사람들이 한 부대에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고 서로 토론하고 미래를 함께 구상하는 것이 놀랍다”며 “ 이것은 새로운 국가의 탄생과 같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침공이후 100일간 푸틴의 군대는 전투에서 승리와 패배를 맛봤다. 하지만 푸틴의 경솔한 침공은 전략적 파국으로 향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적에게 포위됐지만 단결했다. 우크라이나는 푸틴이 전쟁을 통해 제거하려고 했던 바로 그 ‘안티 러시아’ 세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