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심장, 수도 워싱턴DC 한복판에 한국전쟁 전사자 수만 명의 이름이 새겨졌다.
한국전참전용사추모재단(KWVMF)은 정전협정 69주년인 27일(현지시간) 워싱턴DC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에서 한국을 위해 싸우다 숨진 전사자 수만 명의 이름을 새긴 ‘추모의 벽’ 공식 제막식을 열었다.
추모의 벽은 전날 한국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에게 먼저 공개됐다. 공식 제막식이 열린 이날 오전 6시30분께 찾은 현장에는 전날 유가족들이 두고 간 추모의 꽃송이들이 눈에 띄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화환이 추모의 벽으로 들어서는 길에 놓여 있었다.
추모의 벽으로 둘러싸인 가운데에는 ‘기억의 못’이 조성돼 있으며, 못을 둘러싼 석판에는 미군과 유엔군 사망자 및 실종자 수가 적혔다. 미군 7140명, 유엔군 9만2970명이라는 숫자를 읽은 뒤 눈을 들면, 맞은편에 새겨진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는 글귀가 선명히 눈에 들어온다.
지난해 3월 시작된 추모의 벽 공사는 지난 5월 마무리됐으며, 이날 공식 제막을 통해 일반 대중에게 완전히 공개됐다. 미국 한국전 전사자 3만6634명과 카투사 전사자 7174명 등 전사자 4만3808명의 이름을 높이 1m, 둘레 130m에 이르는 화강암에 빼곡히 담았다.
전사자의 이름을 담은 화강암판은 개당 4~8t에 두께 약 72㎝의 곡선형으로 제작됐으며, 총 100개에 달한다. 전사자들의 이름은 군별, 계급, 알파벳 순으로 각인됐다. 특히 일등병·이등병 이름을 담은 화강암판만 53개로, 당시 수많은 청년 장병의 희생을 엿볼 수 있다.
이날 공식 제막 행사에는 양국 정부 관계자는 물론 수많은 참전용사·가족이 자리를 채웠다. 한국 정부에서는 이종섭 국방장관과 박민식 보훈처장이, 미국 정부에서는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배우자인 ‘세컨드 젠틀맨’ 더글러스 엠호프와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이 참석했다.
오전 10시로 예정된 행사를 앞두고 흐렸던 날씨는 점점 맑아졌다. 해가 따가워지고 기온이 오르자 보이스카우트 소속 소년들이 아이스팩과 생수를 참석자들에게 건넸다. 고령의 참전용사들과 그 가족들은 더운 날씨에 부채질을 하면서도 자리를 지켰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행사에 박민식 보훈처장의 대독으로 축사를 보냈다. 윤 대통령은 축사에서 “72년 전, 수많은 미국의 젊은이들이 공산화의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전쟁의 포화속으로 뛰어들었다”라며 이 과정에서 희생된 영웅들을 기렸다.
아울러 “미군 전사자 3만6634명과 한국군 카투사 7174명의 이름을 한 분 한 분 새김으로써 그들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게 됐다”라며 참전용사들을 ‘자유의 수호자이자 진정한 영웅’으로 칭하고, “희생 위에 우뚝 세워진 한·미 동맹을 더욱 굳건히 지켜나갈 것”이라고 했다.
역시 축사에 나선 조태용 주미대사는 “한반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한 각국을 인식하고 싶다”라며 한국전쟁 참전국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기도 했다. 각국의 이름이 열거될 때마다 박수가 나왔는데, 마지막으로 미국을 거명하자 환호가 함께 터졌다.
미국 쪽에서는 세컨드 젠틀맨인 엠호프가 정부를 대표해 축사를 했다. 엠호프는 함께, 용감하게, 우리 자유를 수호하려 나란히 싸운 미국인과 한국인의 희생을 기린다”라며 이들의 희생이 “한국의 번창하는 민주주의와 동맹의 토대를 구축했다”라고 평가했다.
아울러 양국 참전용사 및 가족, 한국전참전용사추모재단(KWVMF) 등이 벽 건립을 추진했다며 “아름다운 기념물”이라고 했다. 또 지난 5월 한·미 정상회담을 거론, “바이든 대통령과 윤 대통령은 한국과 미국의 동맹이 어떤 때보다 강력하다는 점을 재확인했다”라고 했다.
제막을 앞두고 일각에서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리라는 전망도 나왔으나 실제 성사되지는 않았다. 다만 바이든 대통령은 전날 포고문을 통해 “매일 우리 국가의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기억하며, 그들이 가능케 한 국가와 가장 높은 이상을 기린다”라고 했었다.
존 틸럴리 KWVMF 이사장은 “이 기념물이 매년 이곳을 찾는 수백만 명에게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는 점을 상기시키기를 바란다”라며 “(한국전쟁이) 더는 ‘잊혀진 전쟁’이 아니라 ‘기억된 승리’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