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67일째인 9일(현지시간) 러시아가 점령 중인 우크라이나 남부 크름반도 공군비행장에서 대규모 연쇄 폭발이 발생했다.
러시아는 이번 폭발이 우크라이나 군 공격으로 발생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이를 명분 삼아 러시아가 확전에 나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지난 6월 자국 영토인 크름반도를 공격할 경우 3차 대전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타스 통신, BBC, CNN,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들을 종합하면 이날 오후 3시께 크름반도 서부 해안 노보페도리브카 인근의 러시아가 운용 중인 사키 공군기지에서 최소 12차례 대규모 폭발이 발생했다.
노보페도리브카 내 사키 공군기지는 우크라이나 해안 봉쇄를 주도해 온 러시아 흑해 함대의 본거지인 세바스토폴항에서 북쪽으로 약 50㎞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소셜 미디어에 올라온 영상엔 공군 기지 일대에 여러 차례 폭발이 일어나 거대한 연기 구름이 치솟고 있는 모습이 담겼다. 이를 배경으로 해변에서 관광객들이 대피하는 모습도 보인다. 목격자들은 최소 12차례 폭발음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성명을 통해 “(현지) 오후 3시20분께 노보페도로프카 인근 사키 공군기지에서 전투기 탑재용 비축 탄약이 폭발했다”고 밝혔다.
러시아 국방부는 최초 항공 장비 및 인명 피해가 없다고 밝혔지만 이후 “1명이 사망하고 어린이를 포함해 6명이 다쳤다”고 정정했다. 러시아 보건부는 추후 부상자를 9명으로 집계했다.
러시아는 우선 피해 수습에 주력하면서 사후 대응책 마련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크름반도 지도자 세르게이 악쇼노프는 “우크라이나 군이 연루됐을지 여부에 대한 추측은 하지 않겠다”며 테러경보를 황색수준으로 격상했다.
러시아가 수립한 크름반도 행정당국은 인근 주민 약 30명을 대피시켰다. 다만 60일 간의 비상 사태를 선포할 것이란 우크라이나 언론의 보도에 대해선 “가짜”라고 부인했다.
정확한 폭발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군의 관리 소홀에 따른 폭발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공식적으로 자신들과는 무관하다는 식의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고 있다.
미하일로 포돌랴크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보좌관은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탄약 폭발의 스펙트럼상 이번 폭발은 러시아 군대의 임무 수행에 소홀했기 때문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NYT는 “우크라이나 정부 관리들은 우크라이나 군의 개입을 공식적으로 확인하지는 않았다”면서도 “다른 고위 당국자는 폭발의 배후에 우크라이나가 있다는 것을 정확히 부인하지는 않았다”고 보도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날 대국민 화상 정례 연설에서 크름반도에 대한 수복 의지를 강조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벌인 전쟁은 크름반도를 점령하면서 시작됐다는 점을 잊지 않을 것”이라며 “크름반도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리나 베레슈크 우크라이나 부총리는 텔레그램에 “오늘의 폭발은 크름반도가 누구의 것인지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준다”며 “왜냐하면 그 곳은 우크라이나이기 때문”이라고 작성, 크름반도 수복 의지를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추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군이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를 주장할 경우 3차 대전으로 점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무기를 앞세워 자국 영토를 침범했다는 논리로 책임을 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 우크라이나군은 지난 6월 크름반도 해역의 러시아 흑해 석유 시추 시설과 7월 말 세바스토폴시 러시아 해군 시설을 공격한 적은 있지만 크름반도 본토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한 적은 없다.
앞서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지난 6월 27일 미국을 비롯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등 서방 동맹이 자국 영토인 크름반도를 공격할 경우 3차 대전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우크라이나는 최근 러시아가 점령한 남부 요충지 헤르손 수복을 위한 공세적 반격에 총력을 다해왔다. 크름반도로와 헤르손을 연결하는 도로·철도 교량을 파괴하며 러시아 군의 후방 보급로와 탄약고 파괴에 주력했다.
러시아에 있어 헤르손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헤르손을 점령할 경우 러시아 본토를 비롯해 2014년 병합한 크름반도가 연결된다. 동부 돈바스까지 완전 장악해 점령 영토를 넓히겠다는 게 러시아의 구상이다.
러시아가 개전 초 헤르손부터 빠르게 장악한 것은 이러한 맥락이 깔려 있다. 헤르손 지역에 공식 화폐로 루블화를 사용하고, 러시아어(語)를 교육하는 등 빠르게 현지화 시도를 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빠른 시일 내 주민투표를 실시해 헤르손을 러시아 영토로의 강제 병합하려는 과정을 시도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9월 내 헤르손 탈환을 공언하며 러시아 점령 방어 거점을 공략해 왔다. 헤르손 내 50개 마을을 탈환하며 점차 수복 영토를 넓혀왔다. 특히 고속기동포병로켓시스템(HIMARS·하이마스)을 활용해 크름반도와 헤르손을 연결하는 교량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러시아 군의 보급로 차단에 주력했다.
우크라이나 군이 안토노우스키 다리 2개와 노바 카호우카 댐 위의 교량까지 모든 연결 통로를 파괴하자 러시아 군은 동부 도네츠크 전선의 정예 병력을 재배치하는 것으로 헤르손 방어를 강화했다. 부교를 활용해 드네프르강을 건너는 방식으로 군수물자 보급에 총력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