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전 세계에서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누리며 넷플릭스 역대 최고 흥행 드라마 시리즈가 된 ‘오징어 게임’이 이제 마지막 라운드만 남겨두고 있다. 바로 다음 달 12일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마이크로소프트시어터에서 열리는 제74회 프라임타임 에미 시상식(Primetime Emmy Awards)이다. 미국텔레비전예술과학아카데미(The Academy of Television Arts & Sciences·ATAS)가 주최하는 이 시상식은 TV계 아카데미로 불릴 정도로 최고 권위를 자랑한다. ‘오징어 게임’이 여기서 상을 받으면 그야말로 ‘오징어 게임 드라마’가 완성된다.
‘오징어 게임’은 앞서 골든글로브·배우조합·크리틱스초이스 등 주요 시상식에서 수상했다. 이번에 에미 시상식에서도 상을 받으면 영어가 아닌 언어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미국 주요 시상식을 휩쓰는 전례 없는 역사를 쓰게 된다. ‘오징어 게임’은 에미 시상식 13개 부문에서 14차례 후보에 올랐다. 부문수보다 후보수가 많은 건 드라마 시리즈 남우조연상 후보에 배우 오영수와 박해수가 함께 올랐기 때문이다.
‘오징어 게임’은 HBO 드라마 시리즈 ‘석세션'(25개 부문)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부문에서 후보가 됐다. 이에 현지 언론은 ‘오징어 게임’이 빈손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거라고 보고 있다. AP는 “‘석세션’이 올해 에미상 레이스에서 최다 후보작으로 선정됐으나 ‘오징어 게임’이라는 강력한 경쟁자를 만났다”고 했다. ‘오징어 게임’은 작품·연출·극본·남우주연·여우조연·남우조연·여우단역·미술·촬영·편집·음악·특수효과·스턴트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역사를 쓰게 될 이정재
가장 수상 가능성이 높은 건 드라마 시리즈 부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라 있는 배우 이정재다. 이정재는 ‘베터 콜 사울’의 밥 오든커크, ‘오자크’의 제이슨 베이트먼, ‘석세션’의 브라이언 콕스와 제레미 스트롱, ‘세브란스:단절’의 애덤 스콧과 경쟁한다. 만만치 않은 경쟁자들이지만, 현지 언론은 대부분 이정재가 수상할 것으로 예상한다. 뉴욕타임스는 “이정재의 수상이 유력하다”고 했고, LA타임스는 “이정재가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정재가 상을 받게 되면 에미 시상식 최초로 아시아 국적 배우가 연기상을 받는 역사가 쓰인다. 물론 이전에도 아시아계 배우가 에미에서 상을 받은 적은 있다. 2017년 리즈 아메드가 ‘나이트 오브’로 리미티드 시리즈 부문 남우주연상을, 대런 크리스는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로 다음 해 같은 부문에서 수상했다. 다만 이제껏 에미 시상식 후보에 오른 아시아 배우 또는 수상에 성공한 배우는 모두 아시아계일뿐 국적은 영미권이었다. 아메드는 파키스탄계 영국인이고, 크리스는 필리핀계 미국인 혼혈 배우이다. 그밖에 4차례 후보에 오른 적 있는 샌드라 오 역시 한국계 캐나다인이다. 이정재가 상을 받으면 영어를 쓰지 않는 아시아 국적 배우가 처음 후보에 올라 처음 수상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변수는 있다. 역사상 최고의 스핀오프 드라마로 꼽히는 ‘베터 콜 사울’이 올해 시즌을 마감했고, ‘오징어 게임’만 없었다면 넷플릭스 최고 인기 드라마가 될 수 있었던 ‘오자크’ 역시 최근 마지막 시즌이 나왔다. 따라서 밥 오든커크와 제이슨 베이트먼이 상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두 사람은 이미 에미에서 상을 받았다는 점에서 역시 이정재의 수상 가능성이 가장 높은 상황이다.
◇오영수·정호연·박해수·이유미는?
배우 오영수와 박해수는 드라마 시리즈 부문 남우조연상, 정호연은 같은 부문 여우조연상, 이유미 역시 같은 부문 여우게스트(단역)상 후보에 올라 있다. 오영수는 골든글로브에서, 정호연은 미국배우조합(SAG)에서 각각 상을 받았다. 다만 현지에서는 두 배우의 수상 가능성을 아주 높게 보지는 않는다. 남우조연상으로는 ‘석세션’의 키에란 컬킨이, 여우조연상은 ‘베터 콜 사울’의 레이 시혼이 유력하다고 본다. 컬킨은 올해 열린 각종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가장 많이 받은 배우이다. 게다가 뛰어난 연기력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에미에서 상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수상 가능성을 높게 본다. 시혼 역시 ‘베터 콜 사울’에서 뛰어난 연기를 보여줬음에도 그간 상복이 없었다는 점에서 ‘베터 콜 사울’의 마지막 시즌이 끝난 올해야말로 수상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기라는 예측이 많다.
그러나 오영수와 정호연의 수상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현지 매체들은 오영수가 골든글로브에서 상을 받았다는 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성과라고 본다. 또 정호연을 “‘오징어 게임’의 심장이자 영혼”이라며 높게 평가하고 있다. 골든글로브와 미국배우조합에서 두 사람이 상을 받은 것 역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성과였다. 또 다른 후보자인 박해수와 이유미는 수상까지는 힘들어 보인다.
◇연기 외에는?
‘오징어 게임’은 연기상 외 부문에서도 수상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부문으로 꼽히는 건 미술과 음악이다. ‘오징어 게임’의 인기에 큰 역할을 한 게 바로 이 두 가지였다. 극중 게임 참가자들이 함께 모여 게임을 하는 공간은 이전에 어떤 데스 게임(Death Game) 장르 영화·드라마도 시도하지 않은 독특한 형태라는 점에서 전 세계 시청자의 관심을 끌었다. 지난해 ‘오징어 게임’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자 국내외 언론은 한목소리로 “창의적인 형태의 세트장이 이 작품을 관객 뇌리에 깊게 남겨놓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했다.
이와 함께 ‘오징어 게임’의 음악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인기 요소였다. 가수 겸 작곡가 정재일이 만든 ‘오징어 게임’ 사운드 트랙은 타악기와 관악기가 결합된 독특한 사운드의 ‘웨이 백 덴'(Way Back Then) 등으로 크게 주목받았다. ‘웨이 백 덴’은 한 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중독성을 보여주며 국내외 각종 예능 프로그램 및 유튜브 콘텐츠에서 수없이 쓰였고, 해외에서도 ‘오징어 게임’ 하면 이 음악을 떠올릴 정도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오징어 게임’ 음악이 전 세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정재일은 지난 6월 영국을 기반으로 한 세계 최고의 음악 레이블 중 하나인 데카(DECCA) 레코드와 계약을 맺기도 했다.
이밖에도 작품·연출·극본 등에서도 수상할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이 부문에서는 경쟁작들의 완성도가 매우 높기 때문에 쉽지는 않을 것을 예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