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학교를 마치면 친구네 가서 옹기종기 라면을 끓여먹고, 잡담을 하며 시간을 보내던 그런 세월이었다. 과외를 하는 몇몇 친구도 있었지만 학원도 그냥 뭐 서예학원이나 태권도 등이 그나마 원하면 가는 학원이었다. 때문에 친구네 집에 모여 수다를 떨거나 숙제를 하는 일이 더 많았다. 물론 잘 사는, 그나마 4인 이상이 앉을 수 있는 밥상이 있는 친구네 집이 인기를 얻었다. 물론 그런 집에는 먹을 것도 많았다.
당시 친구네 부모님(특히 아버님)들은 해외 출장도 자주가셨고, 해외(미국, 일본이 주)에서 선물로 사왔다며 친구가 자랑하는 물건을 함께 가지고 놀기도 했었다. 당시 최고 인기품은 역시 SONY, AIWA의 카세트플레이어는 모두가 갖고 싶어하는 물건 중 하나였다. 물론 동대문에서 팔기도 했지만 무서운 형들은 왜 다 거기 있는지 물건을 사러 가서 삥(?)을 뜯기고 오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아이와는 지금 소니에 합병됐다)
그리고 부모님이 장시간 외출하면 친구집에 모여 하는 일이 또 있었다. 장롱 깊숙히 인지 어디서인지 당시 베타 테이프(비디오테이프)를 찾은 주인집 아들과 함께 모여 야동을 보는 일이었다. 처음 포르노를 접한 친구들은 충격으로 오랫동안 식음을 전폐했고, 나 역시 그런 성인물보다는 MTV를 녹화해 놓은 것들이나 한국에서 상영 금지 처분된(잔인하거나, 영상심의위원회의 입맛에 맞지 않았던) 그런 것들이 더 재밌었다.
당시 한국은 포르노는 물론이고 일본 제품은 한국에 들어올 수 없었다. 특히 문화 예술과 관련해 제재는 상당히 심했다. 미국 음악 역시 검열을 통과한 곡만 들을 수 있었고, 입소문을 탄 음악들은 역시 또 세운상가(또 돈을 삥 뜯기지만 거기밖에 그런 것을 구할 곳이 없었다)를 돌며 당시 빽판이라는 것을 사서 듣고는 했었다. 당시에도 일본 음악은 매니아 층으로부터 큰 인기를 끌었었다. 한국에서는 모조리 금지곡이었음에도 중고등학교 교실에서는 소니 워크맨에 꼽힌 빽판을 녹음한 안전지대의 노래가 큰 인기였다.
90년대 사회 초년생일 때 아오이 소라(일본 성인배우)를 법적으로 공식적으로 안전하게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일본을 가는 방법뿐이었지만 남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아키라 만화영화는 카피에 카피를 거듭해 영상에 줄이 쭉쭉 갔지만 큰 인기를 끌었다.
일본의 문화예술(?)이 한국으로의 침투를 적극적으로 막았지만 정부의 정책은 실패했다. 나름 나같은 내 친구들같은 친일파(?)들 때문에 결국 일본의 문화는 음성적으로 한국사회에 깊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일본 영화가 하나 둘 정식 개봉되기 시작했고, 일본 문화가 한국사회에 널리 퍼지게 됐다. 이게 다 나같은 친일파 때문이 아니었나? 반성을 해 본다. 그런데 반성할 찬스가 오기도 했다.
한국이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에 큰 실망감과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대통령도 일본에 더이상 지지 않겠다고 했고,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라는 전략을 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한국이 쥐고 있는 패는 아직 꺼내지도 않았다. 마땅한 보복조치라고 내놓은 것도 없다. 우리 그렇게 당하고만 있는 바보가 아니다.
아무튼 개인적으로도 그간 친일행동에 대해 반성하고, 나라에 되갚을 찬스가 왔다.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기도 하다. 그 때처럼 광장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지는 못하지만 나름 독립운동을 할 때인가 보다. 일본 수입품으로부터의 독립운동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