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헌강왕이 동해안 물가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길을 잃었다. 천문을 읽는 신하가 말하길 ‘이것은 동해 용(龍)의 조화이니 좋은 일을 베풀어야 할 것’이라 했다.
이에 왕이 근처에 절을 세우자 동해용이 기뻐하며 일곱 아들과 함께 나타나 왕의 덕을 찬양하여 춤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중 한 아들이 왕을 따라가 정사를 도왔는데 그가 처용(處容)이다. 왕은 그에게 벼슬을 주고 미녀를 아내로 주었다. 헌데 아름다운 그녀를 흠모한 역신(疫神)이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해 밤에 몰래 그의 집으로 가 동침했다. 이 때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는 춤을 추며 노래 부르고 물러났다 한다.
‘서라벌 달 밝은 밤에/밤늦도록 놀고 지내다가/
집에 돌어와 자리를 보니/다리가 넷이로다/
둘은 내 것이네만/둘은 뉘 것인가/
본디 내 것이건만/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신라 향가 처용가(處容歌)다.
그러자 역신이 모습을 드러내고 처용 앞에 꿇어앉아, ‘내가 공(公)의 아내를 사모하여 범하였음에도 공은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니 감동했다.
이후부터는 공의 얼굴이 있는 곳이면 나타나지 않겠노라’고 맹세했다.
이에 사람들은 액막이의 상징으로 처용의 모습을 그려 문에 붙여 역병과 사기(邪氣), 나쁜 기운을 물리치게 했다. 헌데 처용의 탈의 생김이 너무 이국적이어서 외국인일 것이라는 추측이 많았던 가운데 고대 페르시아의 서사시 ‘쿠쉬나메(Kushnameh)’에 신라와 관련된 기록이 많이 수록된 것이 발견되면서 처용의 설화와 출신도 밝혀질 가능성이 커졌다.
고대 페르시아, 지금의 이란의 대서사시 ‘쿠쉬나메’에는 ‘바실라(Basilla)’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바로 신라를 일컫는 말로 ‘아름다운 신라’라는 뜻이라고 한다.
멸망한 사산(Sāsān) 왕조 페르시아 왕족이 신라의 공주와 혼인하여 낳은 왕자가 침략국으로 들어가 폭정자를 물리쳐 복수한다는 내용이다.
물론 ‘쿠쉬나메’가 정통 역사서가 아니고 구전된 서사시라는 점에서 기록이 정확하다고 할 순 없다 해도 양국에 대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것은 그 관계를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게다가 신라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페르시아산(産)으로 보이는 유물들 또한 이러한 국제적 교류를 뒷받침한다.
이란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신라 유물 140여점 중 금관과 허리띠 등과 함께 이란 문화의 흔적이 담긴 유물이 많고, 경주나 경북 칠곡 등지에서 나오는 많은 유물들 역시 사산왕조 페르시아 계통이며, ‘왕오천축국전’을 쓴 신라의 혜초가 들렀던 파사국(波斯菊)이 바로 페르시아이고, 오늘날 ‘코리아’란 이름도 예성강 하구의 국제무역항 벽란도를 드나들던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상인들을 통해서 유래됐던 걸 보면 이미 오래전 페르시아와 한반도의 관계가 밀접했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이처럼 교류 역사가 깊은 한국과 이란의 관계가 때 아닌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외교 리스크에 직면했다.
지난 15일 UAE(아랍에미리트) 순방 중 현지에 파병된 우리부대 장병들을 만난 자리에서 ‘UAE의 적은 이란’이라고 한 발언 때문이다. UAE를 비롯한 걸프만의 인근국가들은 걸프협력회의(GCC)를 결성해 이란의 정치적, 군사적 위협에 맞서 왔는데 특히 UAE가 이란과 사이가 안 좋다.
이후 2020년 이란은 GCC 국가들과 미국, 이스라엘 등 서방국을 적으로 분류했는데 한국도 포함돼 있다.
1962년 한국과 수교한 이란은 1970년대 중동 붐의 핵심국가였다. 이로인해 1977년 테헤란 시장의 방한을 계기로 해서 두 나라는 서울과 테헤란의 주요 도로에 각각 ‘테헤란로’와 ‘서울로’란 이름을 남기기까지 했지만 1979년 이란혁명 이후 양국관계는 소원해져 왔다.
문제의 발언 이후 한국정부는 해명을 내놓았지만 이란은 수긍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오해는 풀어야겠지만 교전단체나 독재국들과 동맹을 규정한 이란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도 교역 상대국으로서의 중요한 관계를 감안해 보다 탁월한 외교술이 절실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