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 벅(Pearl Buck) 여사의 ‘대지(大地)’에서 잊히지 않는 장면 중의 하나가 메뚜기(황충) 떼의 습격 장면이다. 온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날아드는 메뚜기 떼는 세상을 밤처럼 깜깜하게 하고 저희들끼리 서로 부딪치는 소리마저 천지를 진동시킬 정도였는데 그들이 내려앉은 곳의 농작물들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온통 황무지로 변했다.
천재지변까지 책임졌던 왕: 탄황의 고사
그런 메뚜기 떼가 자주 출몰하던 중국에선 황제마저 손수 나선 적이 있다. 백성의 소리에 늘 귀를 기울이고 당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아 명군으로 칭송받는 당태종 이세민 때였다. 가뭄에 황충 떼가 곡식을 사정없이 훑어버리고 백성들은 발만 동동 굴리고 있을 뿐이었다. 시름에 빠진 태종이 황급히 들에 나가 그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고는 ‘백성의 곡식을 갉아먹으려면 차라리 내 심장을 갉아 먹으라’면서 메뚜기 두 마리를 잡아 삼켜버렸다. 그러자 메뚜기 떼가 몰살했다고 한다. 이른바 ‘탄황(呑蝗)’의 고사다.
조선의 영조는 전국에 황충 떼가 기승을 부리고 가뭄까지 겹치자 이 고사를 예로 들면서 ‘아무리 어질고 의로운 군주라 해도 정성이 없었다면 어찌 황충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는가? 그것은 결국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있었으니까 할 수 있는 일이었다’며 자책으로 깊은 시름에 잠겼었다고 한다.
어느 나라나 왕(王)은 하늘이 낸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하늘이 왕을 낸다고 해도 왕이 어려워해야 할 것은 하늘이고 나라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총명을 넓히고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고 스스로 반성하며 백성을 잘 다스려 나라를 굳건하게 하는 것이라 했다.
피 바람 부른 ‘왕'(王)의 글자
해서 한자를 풀이한 ‘설문해자’에서도 ‘임금 왕(王)’자의 ‘3개의 가로획은 하늘, 사람, 땅을 뜻하며, 이 세가지를 관통하는 것이 왕이다’라고 풀이하고, 서경 또한 ‘천지는 만물의 부모이고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니 그 가운데 진실로 총명한 자가 임금이 되고, 임금은 백성의 부모다’라고 했음이다.
허나 이는 갑골문을 보기 전의 해석일 뿐 왕(王)의 글자는 ‘도끼’ 모양에서 출발해 변화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그랬을까? 역사는 왕이 되기 위해서 피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수많은 정난(政亂)으로 얼룩져 왔다. 그러고 보면 메뚜기마저 집어삼킨 명군 당태종도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형제들을 도륙했으니 피로 얼룩진 그의 이력이 성군이 되었다 하여 면죄부에서 자유롭지는 않을터다.
그럼에도 정란(政亂)의 주인공들은 나름 그럴사한 명분을 내세워 일을 꾸미고 하늘이 점지한 듯한 모략에 주로 참요(讖謠)나 해몽(解夢) 혹은 파자(破字)를 그 수단으로 삼았다. 참요는 민심을 이용해 바라는 바를 얻어내거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세간에 퍼뜨리는 노래다.
대표적인 예로 숙종 때 장희빈의 모함으로 쫓겨난 인현왕후를 두고 민간에 나돌던, ‘미나리는 사철이고 장다리는 한 철이라~’ (미나리는 인현왕후 민 씨, 장다리는 희빈 장 씨)라고 한 노래나, ‘선화공주님은 밤마다 몰래 서동의 방을 찾아간다’고 세간에 퍼뜨린 서동요(후에 서동은 백제의 무왕이 되고 선화는 왕비가 된다)같은 노래가 유명하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찌라시나 SNS에 나도는 소문같은 걸게다.
파자 참요의 혹세무민
그런가 하면 ‘트위터’를 닮은 짧은 파자(破字) 노래도 있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중종 때 기득권층과 공신들 간의 권력 암투로 어지로운 정국 속에서 새로 나타난 신진사대부 세력에 위기를 느낀 기득권 세력이 나뭇잎에 꿀을 발라 글을 써 개미가 갉아 먹게 했다. 나타난 글자는 주초위왕(走肖爲王). 走와 肖를 합한 조(趙) 씨가 왕이 된다는 예언인 셈이다. 이 모함으로 신진세력의 중심인물 조광조는 참형을 당했다.
고려말에 떠돌던 파자 참요는 목자득국(木子得國)이었다. 목(木)과 자(子)를 합치면 이(李)자가 되니 이씨가 나라를 얻는다는 뜻인데 그 말대로 이성계가 왕이 되었다. 이성계는 참요뿐 아니라 해몽으로도 덕을 봤다. 석가래 3개를 등에 짊어진 꿈을 꾸고는 하도 괴이하여 고승에게 불어본 즉, 왕이 될 운명이라는 풀이를 받은 거다. 사람이 석가래 세개를 지었으니 왕(王) 자의 형상이라는 거다. 꿈이야 본인말고는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그 진위를 알수 없는 것 아닌가?
그러고 보면 ‘이사금(니사금)’이라 불렀던 신라의 임금이 한결 돋보인다. 성스럽고 지혜로운 이는 이(齒)가 많다고 해서 왕을 뽑을 때 떡을 물어 보게 한 다음 ‘니(齒)의 금(자국)’을 본 연유로 ‘잇금’에서 ‘이사금’이란 말이 나왔으니 말이다.
대통령과 프레지던트 그리고 왕
아무튼 이제 그런 왕(王)의 시대는 가고 프레지던트 (President) 시대가 되었다. 프레지던트는 ‘회의를 주재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미국 독립이전에 사용하던 대륙회의의 ‘의장’에서 비롯됐다. 이는 미국이 유럽의 권위적이고 민중 위에 군림하는 성격을 지녔던 ‘황제’나 ‘왕’이라는 용어 대신 신대륙의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긍지의 발로였다.
이 프레지덴트를 한국과 일본에서는 ‘대통령’으로 번역한다. 일설에 따르면 중국과 일본의 옛 무관 벼슬을 ‘통령’이라 했는데 일본이 여기에 ‘대(大)’를 붙여 만든 용어를 한국이 그대로 가져와서 쓴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말도 실제로는 공화제 민주국가에 합당치 않다며 바꿔야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헌데 느닷없이 최근 왕(王)이라는 단어가 한국사회에서 다시 소환되고 있다. 대선 주자 한사람이 손바닥에 왕(王)자를 쓰고 나온 것 때문이다. 이를 두고 주술이니 부적이니 논쟁이 한창이다. 큰 선거 때마다 정가(政街)에선 미신과 관련된 온갖 소문이 떠도는가 하면 조상 묘지 이장 또한 곧잘 등장한다.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미국 워싱턴 정가에서도 이따금 미신이 등장한다. 1981년 레이건 대통령 암살시도 사건 후 낸시 여사는 남편의 일정과 안전을 점성술사에게 의지했고, 그 점성술사가 백악관의 막후 실력자로 주목받았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레이건이 스타워즈, ‘별들의 전쟁’을 구상하는 뒤에서 영부인은 ‘별들에게 물어보는’ 점성술에 의존하는 모양새가 된 셈이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나약함 속에서 자라나는 무한한 욕망의 덫에서는 고대나 현대나 다를 바가 없음이다. 다만 왕이든 프레지덴트든 항상 마음에 새길 것은 용비어천가 마지막장 경구다. ‘성군(聖君)이 니샤도 경천근민(敬天勤民)하샤 더욱 구드시리이다’(훌륭한 왕이 대를 이어도 경천근민해야 국가가 더욱 굳건해 질 것이다) 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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