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 리비(Ivo Livi)는 이탈리아에서 가난한 농부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가 태어난 뒤 얼마 후 가족이 프랑스로 이주해 마르세유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이탈리아 공산당원이었는데 이탈리아에서 득세하던 파시스트당이 공산주의자들을 압박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에 아무 연고가 없었기에 궁핍한 가정환경으로 11세까지 학교를 다니고 돈벌이에 나서야 했던 그는 처음에는 항구에서 막노동을 하거나 누이의 미용실에서 일을 했지만 그 뒤 뮤직살롱에서 노래를 불렀다. 키가 컷던 그는 음악에 대한 뛰어난 본능적인 감각과
브로드웨이 뮤지컬 배우처럼 춤추며 노래하는 특이한 스타일로 인기를 끌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암운이 짙어지던 시기, 이보가 파리에서 가수로 자리를 잡아가던 중 당시 제1의 카바레였던 물랭루즈에서 여섯 살 연상의 정상가수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를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곧 연인이 되어 같이 살지만 얼마 후 헤어지게 된다. 이 무렵 이보는 영화에도 데뷔하면서 샹송가수 겸 배우로도 활동하기 시작한다.
아버지와 형처럼 이보 역시 공산주의자였는데 1968년 ‘프라하의 봄’에 소련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회의를 느낀 그는 공산당에서 탈당한 후 배우라는 직업을 통해 좌우파를 가리지 않고 독재체제에 대항하는 반체제 인사들을 후원하는 데 힘을 쏟았는가 하면 반전평화운동 그리고 인권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한때 프랑스 대통령후보로까지 거론되기도 했지만
그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대통령의 자리가 갖는 모든 입신양명을 자신은 어느 정도 이미 이루었기 때문이며 ‘곡예사 노릇’을 원치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어디 그것뿐인가? ‘매력적인 프랑스 남자’로 알려진 이보는 여성편력도 화려했다. 우아하고 부드러운 이보에 정신없이 빠져든 많은 정상급 여배우들과 염문을 뿌렸는데 셜리 매클레인을 비롯해 카트린 드뇌브, 이자벨 아자니, 마릴린 먼로 등 이었다.
역시 프랑스 유명 여배우였던 시몬 시뇨레(Simone Signoret)도 남편과 이혼하고 이보에게 와 평생의 연인이자 반려자가 되어 30 여년을 살았는데 그의 여성편력에 마음고생이 심했지만 언제나 그를 변호하고 가정을 지켜냈다고 한다. 마릴린 먼로와의 염문에 대한 사회적 소란에 대해 시몬은 ‘마릴린 먼로가 품에 안겨 있는데 무감각할 남자가 어디 그리 많겠어요?’라고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단지 거기에만 그친것은 아니다. 시몬은 그에게 당대의 저명한 작가들의 책들을 읽도록 했으니 첫사랑 에디트 피아프가 그가 가수로서 급성장하는데 일조했다면 아내 시몬은 그의 지성을 쌓는데 스승이었던 셈이다. 이 때문에 그가 가난으로 학력이 전무하면서도 피카소나 프레베르, 장 콕토 등 당대의 지성들과 거리낌 없이 교유(交遊)한 지식인일 수 있었던게 아닐는지.
그런 시몬이 먼저 삶을 마감한 후 이보는 ‘내 인생의 진정한 위안을 얻은 여인은 아내 시몬 뿐’이었고 ‘오직 한 사랑’이었다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랬을까? 시몬이 세상을 떠난 후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 뿐아니라 그녀의 묘지를 한 번도 찾지 않았다는데 그것은 시몬이 그에겐 사라져버린 과거가 아니라 늘 함께 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런 그에게 2년 후 새로운 사랑이 또 찾아왔다. 젊은 여인 카롤 아미엘을 만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67세때 비로소 처음으로 자신의 아들을 얻게 된다. 새로운 벅찬 감동을 느낀 그는 아이에게 보여줄 아빠의 모습을 위해 다시 무대로 돌아갈 계획을 세우지만 이루지 못하고 쓰러지고 만다.
그의 죽음 또한 묘하다. 그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심장마비로 죽는 장면을 연기한 1991년 11월 9일 그날 밤 진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가 사망했을 때 프랑스의 모든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은 정규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그가 출연했던 영화와 그의 대표적 샹송 ‘고엽’을 방송했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그는 태어난 곳만 이탈리아였을 뿐 영원한 프랑스인으로 살다 간 국민배우이자, 국민가수였다’고 추모했다.
여담이지만 이런 그가 세상을 뜬 후 프랑스의 한 여인이 그의 아이를 낳았다며 친자소송을 내자 유전자 검사를 위해 그의 무덤이 파헤쳐친 적도 있다. 결과는 불일치로 판명났지만 살아 생전 그의 여성 편력을 말해주는 사건이었던거다. 세기의 연인 ‘이브 몽땅(Yves Montand)’ 이야기다. 어려서 어머니가 계단 위에서 그를 부를 때 ‘이브야, 계단으로 올라와 (Monta)!’라고 했던 말에서 자신이 지어낸 예명이라고 한다.
코비드19와 전쟁을 치루기 시작한지 2년이 다 되가는데도 세월은 무심한 듯 어느덧 11월이다. 스산한 11월하면 떠오르는 노래 중에 단연 ‘고엽(枯葉)’이 있다. 이브 몽땅이 1946년 배우 데뷰작 영화 ’밤의 문(Les portes de la nuit)’에서 불렸던 주제가다.
프랑스어로 ‘죽은 나뭇잎들(Les Feuilles Mortes)’이라는 제목처럼 늦가을의 낙엽을 밟으며 떠나간 연인을 추억하는 내용이다. 프랑스 시인 자크 프레베르(Jacque Prevert)가 작사하고, 조제프 코스마(Joseph Kosma)가 작곡했다. 영화는 완전히 실패했지만 그가 영화 속에서 부른 주제가가 엄청난 인기를 얻고 세계인들의 가슴에 남아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는지.
노래 ‘고엽’을 대하기 전에 작사자 자끄 프레베르의 원래 시(詩) 한구절을 감상 해보자.
‘기억해 보세요, 함께 지낸 행복스런 나날들을/그때 인생은 훨씬 더 아름답기 그지 없었고/태양은 훨씬 더 뜨거웠지요/나는 그 나날들을 잊을 수 없어서 마른 잎을 갈퀴로 긁어 모으고 있어요/모든 추억도, 또 모든 후회도 함께/ … /하지만 인생은 사랑하는 이들을 갈라 놓지요, 아무 소리도 없이/그리고 바다는 모래위에 남겨진 헤어진 연인들의 발자국을 지워버리죠’
우리말로 번역된 ‘고엽(枯葉)’은 ‘마른 잎’을 의미한다. 가을이 깊어지면 낙엽마저 마르는 것은 자연의 섭리다. 한 계절 푸르던 나뭇잎들이 11월이 되면 단풍들고 낙엽이 되었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생(生)과도 닮았다. 해서 11월을 ‘고엽의 달’이라고도 하는 이유다.
하지만 낙엽은 쓸쓸하고 허망한 것만은 아니다. 나뭇가지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나무들이 자신의 참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흔적이요, 또 다시 새 생명을 위한 준비가 그 속에 있어서다. 해서 체로키 인디언들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하는가보다.
11월을 우리말로 ‘눈마중달’이라고도 한다. 첫눈을 마중 나가서 맞이하는 것을 말한다.
마중물이 땅 속 깊은 곳에 있는 맑은 물을 끌어올리는 것처럼 무언가를 마중한다는 것은 참으로 정겨운 일이 아닌가! 그러니 11월은 다 지나가는 시간이 아니고 새로운 마중에서 얻게 되는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시작의 의미인 셈이다.
어쨋거나 그러고 보니 우리에게도 ‘고엽’ 못지 않은 낙엽이 주는 ‘명동의 샹송’이라는 추억의 노래가 있다.
‘나뭇잎은 떨어지고/나뭇잎은 흙이되고/나뭇잎에 덮혀서/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어지만/그 눈동자 입술은/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박인환의 시(詩) ‘세월이 가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