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은 명문가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형들은 당대의 재사였고 동생 허난설헌은 시와 그림으로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 또한 조선에 천주교를 소개한 선각자이자 대실학자이기도 했지만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벼슬에서 쫓겨나고 왕권과 고루한 사회체제에 도전한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자유사상가인 프랑스의 루소(Rousseau)에 필적한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민중의 저항을 이끄는 책 ‘호민론 (豪民論)’을 저술하기도 했다. 여기서 그는 천하에 가장 무서운 존재는 오직 민중 뿐이라며 이를 항민(恒民), 원민(怨民), 호민(豪民)의 세 부류로 나누었다.
‘항민’은 관의 지시에 순종하면서 원만하게 살아가는 부류, ‘원민’은 관의 탄압에 원성은 하지만 행동하지 않는 부류, ‘호민’은 비판의식을 갖고 저항하는 계층을 말한다. ‘홍길동’이 바로 그런 호민이었다.
호민 같은 사회에 대한 분노와 저항은 영국의 존 오즈번의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Look Back in Anger)’는 희곡에도 잘 나타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기성세대로부터 배신당하고 버림받은 영국 젊은 세대의 분노와 열망을 그린 작품이다.
‘어른들은 세상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이 문장 하나가 박탈감에 휩싸여 있던 청년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아 ‘앵그리 영 맨 (Angry Young Men)’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지고 저항문화의 모태로 자리 잡았다.
이런 기성세대의 위선에 대한 분노는 프랑스의 ‘6-8운동’으로 이어져 낡은 가치관과 권위주의에 맞선 청년들의 시위로 결국 드골 대통령을 하야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운동은 전 유럽은 물론 미국으로까지 퍼져 히피(hippy)주의와 우드스탁 록 페스티벌’(Woodstock Music and Art Fair)로 발전하면서 반전, 반권위 그리고 사랑과 평화로 함께하는 것으로 진화했다. 결국 실패했지만 그 파장과 영향은 컸다.
이렇듯 양극화가 심화되는 사회 체제 속에서 무언가 부족한 결핍에서 오는 사람들의 분노와 고립감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그 한 예로, 백인 남성들은 소수 인종 등에 의해 주류에서 밀려났다는 박탈감, 이민자들에 의해 일자리를 잃었다는 상실감으로 분노하고 위기를 느낀다. 그리고 성난 이들의 분노에 주목한 트럼프의 부추김이 유효해 대선을 향한 재등장의 돌풍이 다시 일고 있는 거다.
이러한 때에 이와 맞물려 ‘성난 사람들(Beef)’란 드라마가 지난 15일 미 방송계 최고 권위인 에미상의 미니시리즈 부문에서 작품상, 감독상, 남녀 주연상 등 8개 트로피를 받은 것이 우연은 아닐게다.
일상의 굴레에서 불만이 가득하고 화가 나던 참에 두 주인공은 할인마트에서 주차문제로 시비가 붙고 이 사소한 시비가 보복운전으로 치닫는다. 두 사람의 내면에 잠재된 분노가 불씨가 되어 폭발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하지만 평론가들은 이 드라마가 많은 상을 휩쓴 것은 동양인들이라는 소수자들만의 특이한 스토리때문에서가 아니라 인물과 소재만 동양일뿐 그 틀과 내용은 일반 할리웃 작품들의 근간과 같아 누구에게나 모두 공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하기때문이라고 했다.
그만큼 지구촌 어디에서나 성난 사람들이 많고 이로 인해 사회는 비난, 낙인, 폭력과 테러가 횡행할 뿐 아니라 사소한 다툼이 치명적으로 돌변하는 ‘시한폭탄의 사회’로 되가고 있다는 얘기다.
‘새들은 노래하는 게 아니야. 고통에 울부짖는 거지’라는 드라마 부제목이 낯설지 않다. 그 고통이 커지면 공격으로 표출되게 되기 때문이다. 이젠 ‘아버지의 술잔엔 눈물이 반이다’라는 말도 옛말이 되어 가려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