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전제사회이었지만 왕권이 절대적인 건 아니었다. 왕과 사대부라 불리는 양반의 관료가 서로 견제하면서 힘의 균형을 이루며 국가를 통치하는 독특한 구조의 정치 시스템이었다.
헌데 여기에 더해 이들을 견제하고 비판하는 제3의 세력이 있었으니 그것이 언관(言官)이었다. 이들은 왕과 관료들을 감찰하고 견제해 권력의 전횡이나 농단 또는 부패를 막았다. 그리고 이때 사용하는 수단이 탄핵이었다. 권력의 남오용에 의한 잘못을 꾸짖고 책망하는 제도였다.
이런 조선시대의 탄핵은 영조 재위 중이 가장 많았고 그 디음으로 숙종 때 거의 2000 여 남짓 있었다고 한다. 영조는 재위기간이 길어 상대적으로 많기도 했지만 숙종 때는 대부분3차례의 환국(換局) 정치 때문에 많았다고 한다.
흔히 사색당파로 불리는 붕당정치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선조 때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허나 당시의 붕당정치는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고질적인 당파싸움과는 달리 각 붕당사이에 다툼은 있었어도 서로 상대를 인정하고 함께 정치에 참여하는 일종의 신사적 공존 대립 관계였다.
그러던 것이 19대 숙종 때에 이르러 붕당정치가 심화되고 정치적 세력 간의 갈등이 격화되자 숙종은 이를 이용해 3번의 환국을 함으로써 정치판을 새로 짜 왕권을 강화하는데 결실을 얻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공존의 정치’를 ‘죽음의 정치’로 전락시켰다는 평이다.
환국(換局)은 정치적 혼란의 국면을 전환시키기 위해 정치 세력을 교체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다보니 한 쪽 붕당이 권력을 독차지하게 되면 다른 한 쪽은 완전히 죽음으로 내몰리는 일당 전제화로 바뀌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붕당정치의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켰고 이 후 조선사회의 악영향을 끼치게 됐다.
지난 3일 밤 10시23분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발동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으로 선포된 비상계엄 이래 45년 만이다. 소극적인 치안 유지 목적인 경비계엄과 달리 비상계엄은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행정권과 사법권이 계엄군에 넘어간다.
계엄의 이유가 반국가, 종북세력이 국회를 장악해 행정과 사법을 무력화시켰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국회 활동까지 원천 봉쇄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에 따라 무장한 계엄군이 여의도 국회 본관까지 진출한 것이다.
이는 3년 전 1월 6일 미 의사당 난입 사건을 떠오르게 한다. 두 사건 모두 헌법을 무시한 대통령들의 민의의 전당 침탈이란 점에서 내란죄에 해당될 수 있다. 다행히도 국회가 일사불란하게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통과시키면서 ‘나홀로 계엄’은 ‘150분 천하’로 끝나게 됐다.
이번 사태에 대한 해외 언론들의 논평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미 블룸버그통신은 ‘민주주의의 등대로 여겨졌던 한국에서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고 했다. 2차 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국 가운데 경제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성숙시킨 유일한 국가인 한국이 한 지도자에 의해 글로벌의 조롱거리가 된 셈이다.
돌연 무능한 리더는 ‘나쁜 일을 하려 한 게 아니지만 능력이 부족하거나 성격 결함 때문에 일을 잘못하는 것’이라는 말을 돌이켜 보게 한다.
손자병법 ‘군형편’에 ‘승리하는 자는 먼저 승리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든 후에 전쟁에 임하고, 패배하는 자는 먼저 전쟁을 일으킨 뒤에 승리를 구한다’고 했다. 다시 말해 승리하는 자는 이미 승리가 확실할 때 싸워서 이기고, 패하는 자는 먼저 전쟁을 시작한 후에 이기는 길을 찾으니 이길 수 없다는 말이다.
헌데 이번 사태를 보면 비합리적이고 충동적인 계엄발의도 그렇지만 계엄군의 움직임 조차 또한 허술했다고 하니 그렇다면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비상계엄은 왜 강행되었을까? 계엄령이 해제될 것을 몰랐을까 아니면 정국 전환을 위해셔였을까 하는 등 여러 찹찹한 생각이 든다.
역사는 두 번 되풀이 된다고 했던가?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우리는 지난 밤 한 편의 희극아닌 희극을 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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