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세기까지만 해도 ‘육안’으로만 보던 세계를 20세기에 들어와 카메라가 보급되면서 우리는 ‘렌즈’를 통해 보게 되었다. 비록 흑백이었지만 새로운 모습을 표출해 내는 작가들의 눈과 손에 우리는 또 다른 경이를 접했다.
그 중에는 20세기의 위대한 인물 사진작가로 손꼽히는 유세프 카쉬(Yousuf Karsh)가 있었다. 대 스타는 물론이고 예술가, 과학자, 왕족, 대통령, 수상 등 지상 최고의 자리에 있는 인사들을 카메라에 담는 것으로 유명했다. 처칠, 케네디, 후르시쵸프, 카스트로, 헤밍웨이, 아인스타인 등 세계적인 인물 치고 그의 렌즈에 안 잡힌 사람이 없다. 해서 그의 카메라 앞에 서지 않고는 레전드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주로 흑백사진을 즐긴 카쉬는 사진 찍기 전에 잠시 대화를 나누면서 상대방을 곤혹스럽게 하거나 당황하게 만들어 자신도 모르게 나타내는 가장 솔직한 순간의 표정을 잡았다고 한다.
윈스턴 처칠을 만났을 때였다. 카쉬는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별안간 그가 가장 즐기는 시가를 그의 입에서 빼내자 순간 처칠은 몹시 불쾌해진 얼굴로 약간 찡그리고 심술궂은 얼굴을 했다. 이 모습이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그의 유명한 사진으로 근엄해 보이지만 실은 화가 나 있는 상태다. 그 성난 표정은 어떤 위엄과 카리스마로 해석될 수도 있는 권력자의 모습이었다.
사진은 시간의 흔적이자 감정의 매개체다. 헌데 이런 권력의 정점에 있는 인물들에게서는 그 어떤 감흥도 잘 우러나오지 않는다. 그 보다는 전쟁터의 군인이나 일반 시민들의 참혹한 순간을 담은 사진이 우리의 깊은 감정을 불러 일으키고 당시의 그들의 아픔과 절규가 마치 지금인양 생생하게 전달되어 온다.
반면 빛바랜 사진 속의 가족들에게선 그리움과 회한이 다가올 뿐 어쩐지 세대간의 단절이 느껴지는 안타까움도 갖는다. 하지만 이제는 AI 시대 답게 이를 이용해 사진 속 인물 표정에 미소 같은 변화를 줌으로써 정서적 유대감은 물론 정체성을 되찾기도 한다.
단절된 느낌은 조국을 위해 순국한 선열들의 빛바랜 사진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 사진들은 대부분 체포되어 적국의 카메라 앞에서 찍힌 수감자 신분의 굴욕적인 사진이었기에 표정은 굳어 보이지만 그 안에는 분노와 절망, 그리고 굴복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뒤섞여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보는 그 분들의 그런 가장 어둡고 힘든 순간조차 우리의 기억 속에서 빛바랜 흑백의 세상에 갇혀 있다는 점에 마음이 저리다. 웬지 특별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이 우리와 아주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와 똑같은 감정을 가진 이분들도 분명 따뜻한 미소를 지녔고 가족이나 친구들과 갖었을 좋은 시간들의 모습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사진 속에 남겨진 그 분들의 무표정한 얼굴이 광복을 맞이한 듯 밝은 미소와 주먹을 불끈 쥔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은 올해 광복 80 주년 특별전을 열면서 ‘이 분들은 모두 생전에 광복을 맞이하지 못해 사진 속에서도 환한 미소를 볼 수 없었다’며 ‘AI 복원 기술로 구현된 미소는 조국 광복의 기쁨을 간접적으로나마 전달하는 감동의 순간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안중근, 유관순, 이봉창, 윤봉길, 안창호 등 독립운동가의 활달하고 정겨운 모습들이다.
엄숙해 보이던 독립투사들의 얼굴에 더해진 밝은 미소를 보면서 더 이상 단순한 과거의 역사적 인물이 아닌 그 시대의 고통과 희망, 그리고 해방의 기쁨을 함께 하는 감동을 느낄 수 있어 눈시울이 붉어진다.
허나 감동은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지만 동시에 우리 자신의 정체성과 도덕적 위안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해서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œur)에 귀기울 필요가 있다. ‘기억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책임의 행위’라고 한 말.
이는 우리가 선열들의 웃는 얼굴을 보며 감동을 느낄 때 그것이 단순한 자기 만족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 감동을 행동으로 연결해야 한다는 것 즉, 실천할 때 책임이 완수 된다는 것울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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