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세기와 20세기 초, 제국주의 열강들은 세계 곳곳에 조차(租借)지역을 세웠다. 조약이라는 이름을 핑게삼아 상대국의 영토 일부를 수십 년, 때로는 영구적으로 빌려 통치했다.
대표적으로 중국의 경우, 아편전쟁 이후 영국이 상하이를 시작으로 프랑스, 미국, 독일, 일본, 러시아 등 열강들이 ‘조계(租界)’를 설치해 자국법을 적용하고, 경찰과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 외에도 홍콩의 신계, 파나마 운하 지대 등이 그러한데 명목상 주권은 남았지만, 실질은 빼앗긴 채 강대국의 군함과 상선이 드나드는 항구로 전락한 것이었다.
조차지역은 국제법상 임대 계약과 유사하지만, 사실상은 강대국이 약소국에 강압적으로 맺은 불평등 조약으로 생긴 경우가 많다. 20세기 중반 탈식민화가 이루어지면서 대부분 반환되었고 오늘날에는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현대에서 거의 유일하게 조차지역의 잔재로 남아있는 곳이 큐바 남동부의 관타나모 해군기지다. 미국은 1903년 불평등 조약으로 그곳을 차지했고, 지금까지도 운영하고 있다. 이후 1934년 한 차례 개정 협상에서 미국이 관타나모 기지를 포기하지 않는 한, 큐바는 관타나모 기지를 미국에 영구 임대하기로 합의했다. 이 때문에 큐바가 반환을 요구해도 미국은 ‘합법적 임대’라 주장하고 있는 거다.
특히 9·11 이후 관타나모 수용소가 설치되면서 ‘테러와의 전쟁’ 포로 수용소로 악명이 높아지더니 최근에는 불법 이민자 수감까지로 이어진 이곳은 국제법과 인권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관타나모는 단순한 군사 시설을 넘어, 조차지역이 법적, 도덕적에서 벗어나 있는 사례로 생겨난 ‘임대’라는 명목을 주권 침해의 핑계로 삼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달리 주한 미군 기지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과 닮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다르다. 현재 주한미군은 약 28,500명의 병력을 보유하며 주요 기지로 평택의 캠프 험프리스가 있다. 이는 태평양 지역 최대 미군 기지로 2004년 한미 합의에 따라 서울과 DMZ 인근 기지들을 남쪽으로 이전한 것인데 서울 여의도의 5.5배에 해당하는 넓이다.
‘캠프 험프리스’의 주소는 ‘AP 96271, USA’. AP(Armed Forces Pacific)는 태평양 지역 미군기지를 말한다. 지리적으론 한국에 있지만, 행정적으론 미국의 일부로 간주한다는 얘기다.
헌데 미군이 한국 측에 사용료를 받는 곳도 있다. 미군 제8전투비행단이 관할하는 군산 비행장은 민간 항공사도 사용할 수 있는데, 활주로 사용료를 미군에게 낸다. 미군이 기지의 유지 및 관리를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무튼 흔히 미군기지를 ‘임대’라고 오해하지만 실제로는 ‘무상 공여’ 방식이다. 동시에 용산을 비롯한 여러 기지는 단계적으로 반환되고 있다. 즉, 주한미군은 제국주의적 조차지역과 달리 동맹과 협정이라는 틀 속에서 주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 미군 기지를 미국이 소유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그린란드와 파나마운하 소유권에서부터 미국 주도의 가자지구 개발 구상까지 쏟아내는 트럼프 대통령의 말은 전략적일 것이다.
그렇게 미루어 볼떼 이번에도 그냥 해본 말은 아닐 것이다. 국제법적, 제도적 현실과는 거리가 있겠지만, 방위비 분담을 둘러싼 압박의 정치적 수사로 받아들여진다.
안그래도 해외 미군 기지는 명목상 동맹과 안보 협정에 기반한다해도 현지 사회에서는 종종 ‘신(新) 조차지’로 비유되곤 하는데 한가지 귀 기울여야 할 게 있다.
‘땅은 빌려줄 수 있어도, 주권은 빌려줄 수 없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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