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3년, 고려의 문신 문익점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붓통 속에 목화씨 몇 알을 숨겨왔다.
당시 면화는 옷감의 혁명이었고, 그 기술을 독점하는 것이 곧 경제적 우위였기 때문에 원나라는 목화 종자의 해외 반출을 국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고려는 들여온 목화씨로 여러 해에 걸친 재배와 기술의 시행착오 끝에 결국 삼베와 모시에 의존하던 옷문화에서 벗어나 따뜻한 무명옷을 입을 수 있게 됐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800년 더 앞선 시대에도 있었다. 중국의 비단이다.
오랫동안 누에를 기르고 비단을 생산하는 기술은 중국의 중요한 기술적 자산으로 국가기밀이었다. 헌데 수년간 중국에 머물던 두 명의 수도사가 지팡이 속에 누에나방의 알을 숨겨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로 가져온 것이다. 당시 중국에서 생산된 비단은 오랫동안 로마 세계의 값비싼 사치품이었다. 비단을 사기 위해 막대한 귀금속이 해외로 흘러나가자 로마에서는 이를 두고 재정적 손실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던 차에 자체 비단 생산에 나설 수 있게 된 거다.
이같은 붓통 속의 목화씨나 지팡이 속의 누에알은 기술을 ‘지키려는 자’와 ‘훔치려는 자’ 사이의 싸움이었던 셈이다.
헌데 흥미로운 건, 바로 그 동로마제국, 즉 비잔티움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정반대의 입장에 처했다는 사실이다. 이번에는 반대로 비잔티움이 ‘지키는 자’가 된 것이다. 7세기, 비잔티움에겐 ‘그리스의 불’이라는 화염무기가 있었다. 물 위에서도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이 무기로 수 세기에 걸쳐 아랍 함대를 막아낼 수 있었다. 해서 황실의 통제하에 제조공정을 여러 단계로 쪼개어 어느 한 장인도 전체 공정을 알 수 없게 했다.
서로 분리된 지식의 일부만 알게 해 배신자 한 명이 생겨도 전체가 무너지지 않게 한 설계였던 거다. 덕분에 이 무기는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할 때까지 약600년간 누구도 재현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다시 800 년 지난 지금 이 오래된 문제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등장했다. 바로 AI의 ‘지식증류’다. 액체 혼합물에서 원하는 성분을 농축해서 얻는 증류과정을 본 따 이름붙인 이것은 훈련 비용이 막대한 ‘스승’격인 거대 AI 모델에게 수십만 개의 질문을 던지고 얻은 답변들을 모아서 비용이 저렴한 ‘학생’ 모델에게 그 패턴을 흉내 내도록 훈련시키는 방법이다.
학생은 스승이 내놓은 답변들을 관찰하고 그 내용을 역추적해 낸다. 말하자면 유명한 셰프의 레시피 메모를 훔치는 게 아니라 그가 만든 요리를 계속 먹어보며 맛을 복원해내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 이 기술이 지금, 미-중 기술 전쟁의 가장 예민한 전선이 되어 있다.
지난해 초, 중국의 DeepSeek가 미국 최상위 모델들과 맞먹는 성능의 AI를 엄청나게 적은 비용으로 내놓자 OpenAI는 DeepSeek가 우회 경로를 통해 자사 모델에 대량으로 질문을 던져 나온 답변을 긁어모아 자사가 수십억 달러를 들여 만든 모델의 ‘지식’을 뻬내 재조립했다고 주장했다. 단순한 학습이 아니라 우회적 기술 이전, 더 나아가 지식재산의 무단 추출이라고 보는 것이다.
헌데 문제는 앞선 이야기들과 조금 다른 차이에 있다. 목화씨와 누에알의 밀반출은 명백한 절도였다. 국가가 봉인한 것을 몰래 훔쳐 국경을 넘었으니까. 하지만 지식증류는 그 경계가 그렇게 명확하지가 않다. DeepSeek가 접근했다고 의심받는 과정은 OpenAI가 스스로 전 세계에 열어놓은 공개 API였다.
말하자면 문을 부수고 들어간 게 아니라, 열려 있는 문으로 걸어 들어가 진열된 것을 관찰하고 돌아나온 셈이다. ‘절도’보다는 일종의 계약 위반에 가깝다고나 할까.
결국 이 논쟁이 시원하게 결론 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다. 목화씨와 누에알은 손에 잡히는 ‘물건’이었기에 붓통과 지팡이를 뒤지면 그만이지만 AI 모델이 뱉어내는 지식들의 그림자는 형체가 없어 세관에서 걸러낼 수도, 붓통 속을 뒤져 찾아낼 수도 없다는 것.
역사는 반복된다. 한쪽은 기술을 온전히 움켜쥐고 물리적 봉쇄망을 치며 ‘그리스의 불’을 만들려 하고, 다른 한쪽은 ‘지식 증류’라는 21세기형 대나무 지팡이를 들고 제국의 담장을 넘어 기술의 정수를 빼내려 한다.
이 패권의 시소놀이는, 이제 알고리즘과 반도체라는 실리콘의 입자 위에서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타오르고 있다. 어디까지가 정상적인 학습이고, 어디서부터 부적절한 지식 추출일까? 불을 관리하는 기술과 비단을 짜는 기술 사이에서, 이제 세계는 지능 자체를 어떻게 다룰지 고심하며 배우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