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은 때로 한 시대의 기억을 붙들어 둔다. 반세기 전, 육영수 여사가 서거한 날 라디오에서 하루 종일 흘러나온 애잔하면서도 장엄한 선율은 아직까지도 내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다.
노르웨이 작곡가 그리그(Edvard Grieg)의 ‘오제의 죽음’으로 기억된다. 입센의 희곡 ‘페르귄트’에서, 방황하던 아들이 어머니 오제의 임종을 지켜보는 장면을 그린 음악이다. 관악도 타악기도 없이 오직 현악기 하나만으로 낮고 느린 걸음에 한 사람이 떠나는 시간을 담았다.
이 곡은 서둘러 울음이 나오게 하지 않는다. 가장 절제된 방식으로 이어지는 선율이 조금씩 무게를 더해 가며 감정을 차올리다가 끝내 가라앉는 모습은 마지막 말을 건네고 싶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람을 닮았다. 슬픔을 설명하는 음악이라기보다 슬픈 사람 곁에 오래 앉아 있는 음악이랄까.
그리그는 성악가였던 사촌 니나와 결혼해 그녀의 목소리를 위해 가곡을 쓰며 살았고, 일찍이 어린 딸을 잃는 아픔도 겪었다. 해서 이 조곡(弔曲)을 그의 삶과 겹쳐 들을 수는 있겠지만 딸을 추모하기 위해 쓴 곡은 아니다.
헌데 그에게는 전혀 다른 표정의 음악도 있다. ‘홀베르그 모음곡’의 첫 곡 ‘전주곡’이다. ‘오제의 죽음’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면, 이 곡은 문을 열고 걸어 나가게 한다. 경쾌한 현(絃)의 음이 앞으로 달려가고 그 위로 활기찬 선율이 펼쳐진다. 같은 현악기인데도 한쪽은 침묵을 품고, 다른 쪽은 출발의 기운을 만드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출발의 자리에 잘 어울리는 이 ‘전주곡’이 특별하게 다가온 것은 얼마 전 USC 총장 취임식에서였다. 지난달 16일, 첫 아시아계 수장이 된 김병수 총장은 취임식에서 음대생 다섯 명과 함께 이 곡을 첼로로 연주했다. 총장이 연단에서 내려와 학생들 곁에 앉아 합주한 것이다. 객석에는 50여 년 전 가난한 유학생으로 이 학교에서 공부했던 89세의 아버지도 앉아 있었다.
축사에서 예술 담당 부학무처장은 총장이 첼로를 켜듯 구성원을 섬기는 지도자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첼로가 가장 눈에 띄는 선율만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낮은 음으로 음악의 토대를 받쳐 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이어 종교생활처장은 첼로의 앞판과 뒤판 사이에서 진동을 전달하는 작은 나무 기둥, ‘사운드포스트’를 첼로의 ‘영혼’에 비유하며 대학 공동체의 영혼을 지키고 구성원 모두가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도록 이끄는 리더십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했다.
참으로 의미 있는 비유다. 대학의 영혼은 건물이나 명성, 순위에 있지 않다. 교수와 학생, 직원이 서로 존중하며 저마다의 역량을 펼치고, 서로 다른 목소리가 조화를 이루게 하는 공동체의 정신에 있다. 첼로 속 작은 기둥처럼 공동체를 지탱하는 힘은 눈에 잘 띄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없다면 전체의 울림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한 번의 연주만으로 지도자의 역량을 판단할 수는 없다. 무대 위의 조화가 대학 운영의 갈등을 저절로 해결해 주지도 않는다. 진정한 리더십은 어려운 결정을 내리고, 서로 다른 의견을 경청하며, 공동체의 미래를 책임지는 과정에서 증명될 것이다.
그럼에도 학생들 사이에 앉아 함께 악기를 연주한 총장의 모습은 대학이 지향해야 할 공동체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앞으로 어떤 기준으로 평가받아야 하는지를 일러 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오제의 죽음’은 상실 앞에서 어떻게 곁을 지키는지를 느끼게 해 주고 ‘홀베르그 전주곡’은 서로 다른 악기들이 만들어 내는 조화의 힘을 알게 해준다. 그리고 첼로 속 작은 나무 기둥은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가 전체의 울림을 좌우할 수 있음을 가르쳐 준다.
좋은 지도자는 혼자 가장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의 작은 떨림까지 듣고 모두가 저마다의 소리로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게 하는 사람이다. 첼로의 영혼이 악기 속에 있듯 대학의 영혼도 그 안에서 함께 배우고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 있을 것이다. 축하와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