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사회와 전문가> 🔺김은희의 문화역사 칼럼🔺

아이가 어렸을 때 영어동화책 파는 서점에서 미국 초등학교 교과서 하나를 훑어보다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를 소개하는 글에 수도를 건설할 당시 측량작업을 담당했던 측량기사 (the surveyor)의 이야기도 함께 실려 있었다. 오래 전 일이라 그 측량기사의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아 위키피디아에 Washington D.C.를검색해보니 놀랍게도 그의 이름 Andrew Ellicott가 언급되어 있었다.

집단지성이라고 할 수 있는 위키피디아에 미국의 수도를 건설할 때 참여한 측량기사의 이름이 나와 있다는 것은 그만큼 미국문화가 기술자 혹은 전문가를 우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키피디아에 나온 설명에 따르면 Ellicott의 측량은 당시에 정확하기로 명성이 나있었다.  미국이 개척시대에 주와 주의 경계를 정하고 새로운 도시와 타운 들을 개발하며 영토를 확장해 나갈 때 Ellicott는 많은 측량사업을 지휘하였다. 그가 펜실베니아 주 정부의 토지부 장관(Secretary of Land Office)직을 맡았을 때 살았던 그의 집은 역사적 장소로 지정되어 있다. 

런던에 갔을 때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둘러보면서도 비슷하게 놀란 적이 있었다.  그곳은 대성당이면서 국가에 기여한 사람들의 무덤이 있는 성스러운 장소이다. 그런데 그곳에 영국의 국왕과 귀족, 저명한 정치인, 군인, 과학자, 문인,음악가, 예술가, 사상가 들과 함께 시계공도 묻혀 있었다. 안내문을 보니 그 시계공은 생전에(16세기 경) 영국에서 가장 시간이 잘 맞는 시계를 만드는 것으로 유명했다.

한국사회에서 영국이나 미국에서처럼 전문 기술자가 대우받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다.  조선후기도 그렇고 산업화되고 근대화된 현재도 사회적인 존경과 대우를 받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특히 문재인 정부 들어서 전문가 집단과 정부와의 갈등은 과거 어느 정권 때보다 심해지고 있다. 요즘 문제시되는 의사들의 파업은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양반 사회에서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밖에 없었다.  과거급제하여 관직자가 되거나 관직없이 ‘아무개의 후손’으로 양반행세하며 선비로 사는 것이 명예롭게 사는 유일한 길이었다. 유교적 자아실현은 국가라는무대에서 관직자로 혹은 준관직자라고 할 수 있는 유학자로 ‘의롭게’ 살아감으로써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었으며 이를 한마디로 ‘입신양명’이라 하였다.  그리고 성인 혹은 도덕군자로 ‘대의’를 위해 살았다고 이름을 날리는 것은 곧 자신의 가문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었고 조상과 부모에 대한 효도였다.

반면에 양반이 직접 노동을 하여 농사를 짓거나 상공업 활동에 종사하는 것은 먹고살기 위해 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는 것이므로 ‘소인’들이나 하는 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경제활동에 뛰어들면 ‘대의’를 추구하는 양반으로서의 명예를 상실하였다. 그 밖에 미술이나 음악 기타 예능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 사람도 입신양명한 인물로 여겨지지 않았다. 지방행정의 실무를 담당했던 서리와 아전 등 향리 계층은 조선 후기 양반이 향권을 장악하면서 지위가 중인으로 격하되었다.  종이를 제조하고 직물을 짜며 염색하고 도자기를 만드는 것과 같은 생산직에서 일하는 전문기술자와 장인들도 비슷한 이유로 천대받았다. 

한국과 일본의 인명사전을 비교한 역사학자 송준호의 연구(1987:59-66)는 명예로운 삶이 한국과 일본에서 어떻게 다른가를 잘 보여준다.  1885년에 발간된 일본 인명사전에 나오는 인물들의 경력은 참으로 다양하였다. 사무라이 귀족과 관료 이외에도 전국적인 규모의 주조업, 미곡상, 해운업, 금융업 등을 통해서 혹은 농업, 광업, 토목업 등에 종사하며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 매우 많았다. 일본에서도 사무라이 계급과 농상공인 계층 사이에 엄격한 신분적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전문가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인정받고 유명해질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인명사전에 그들의 가계배경은 간단히 기재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고 이따금 할아버지 이름이 언급될 뿐이었다.

반면에 1913년에 간행된 우리나라 인명사전에 나오는 인물들의 경력에는 상공업 활동이 전혀 없었다. 이는 당시 우리나라 상공업 발전의 수준이 아주 낮았다는 것을 감안하여도 관료나 유학자 이외의 전문가로서 활동했음을 밝힌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전게서 63).  또한 우리나라 인명사전은 인물의 경력을 소개하는 데 있어 1000년 전의 조상까지 자세히 언급하면서 정작 본인의 직업이나 경력은 지극히 간단했고 그것도 관직이 대부분이었다. 학력은 ‘한문수학’이 대부분이고 직업은 ‘무농'(농업에 힘씀) 혹은 ‘근수선업'(농업을 지칭)이라고 적었고 경력에는 ‘사친성효’ ‘수신근행’ 등 유교적인 덕행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기업활동, 정치활동, 혹은 예술활동과 같은 영역에서 종사한 경력은 거의 없었다.  예를 들면 아래의 인물 박연래는 선대의 웬만한 조상들을 관직과 호를 밝히며 다 망라하고 있다.

“박연래. (주소와 생년월일) 본관은 밀양. 사헌부 규정을 지낸 현의 21세손이요 증직으로 우찬성을 받은 절문의 11세손이며 이조판서를 지냈고 밀산군이란 봉호를 받았으며 호가 백당인 중손의 16세손이다… 이조참판을 지냈고 호가 일휴제인 필정의 7세손이요 통덕랑인 진환의 5세손이며, 재원의 증손이요 경진의 손이며 군수를 지냈고 호가 취송인 영하의 아들이다. 한문을 배웠고 유교를 업으로 하고 있다.”    

전문가에게서 명예를 뺏으면 그는 자기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지 못한다.  그의 직업은 단지 생계유지를 위해 하는 일이 된다. 조선시대 지방에서 행정실무를 담당했던 향리집단이 그랬다.  조선초기부터 정부는 지방 향촌사회의 실세였던 향리들에게 녹봉을 지불하지 않았으며 명예를 나타내는 품계도 부여하지 않았다(이성무, 조선초기의 향리 1980 참조). 그러니 향리 서리들은 자신의 직무에 긍지를 갖지 못하고 책임감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농사지을 시간이 없으니 관리를 속이고 장부조작하고 양곡을 훔쳐내는 등 농간을 많이 부려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양반사족들은 향리들을 지방행정을 어지럽히는 ‘간사한 무리’로 천대하는 악순환이 조선이 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사실 대부분의 전근대사회에서 노동과 직업활동은 그저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아무런 도덕적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런데 근대사회에 들어오면서 분업이 발달하고 다양한 직업이 생겨나며 이에 따라 전문가 집단이 등장하게 된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그의 저서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1985)에서 유럽에서 근대화가 먼저 시작된 것은 유럽의 종교개혁이 세속적인 노동과 직업활동에 하느님의 부르심(a calling)이라는 도덕적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베버에 따르면 중세 유럽에서는 가족과 공동체가 먹고 사는데 필요한 만큼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기도하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세속적인 욕구를 초월하며 사는 삶을 이상적이라고 보았다.  특별히 더 열심히 일하고 기술을 발전시켜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부를 축적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러나 종교개혁 후 신교도들(Protestants)은 세속에서 열심히 일하고 부를 쌓는 것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임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중세유럽에서도 신분계층과 직업에 따라 분업화된 노동을 하는 것은 다 하느님의 뜻이어서 힘들어도 인내하며 자신의 직분을 다하는 것은 종교적 의무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개신교는 이러한 직업관에서 더 나아가 사회적 분업에 따라 노동이 전문화되는 것은 질적으로 그리고 양적으로 생산성을 향상시켜 사회 전체에 기여한다고 보았다.  베버(전게서:161)가 언급했듯이 아담스미쓰의 국부론을 연상시키는 분업론이다.  즉 개신교의 이론가들은 분업이 공공의 이익을 증가시킨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각자에게 맡겨진 일을 열심히 하는 것 자체가 사회전체에 기여하는 것이 된다.  특히 중요한 것은 개신교는 세속에서 직업인으로서 하는 일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성실하게 수행할 것을 강조하였다. 금욕주의적인 자기 절제에 입각해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성공적인 직업인이 되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이윤을 추구하는 것도 개신교는 사회전체를 위해 필요한 것으로 보았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얼마든지 이익을 남길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신에게서 받은 기회를 거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개신교의 관점에서 중세의 가톨릭 수도사처럼 가난하게 살고자 원하는 것은 건강하지 않게 살기를 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것이다.  특히 일할 수 있는 자가 구걸하는 것은 게으를 뿐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었다.  단지, 쾌락을 추구하며 사치하고 방탕하게 살기 위해 부자가 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신교도들은 일상생활에 있어 술마시지 않고 근면하며 잠 많이 자지 않고 시간을 아끼는 등 엄격한 금욕주의적 자기절제(asceticism)를 강조하였다. 

막스 베버에 따르면 이윤을 남기는 것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는 개신교도들의 소명의식은 사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자본주의적 기업활동을 정당화하였다. 또한 노동과 직업에 대한 금욕주의적 소명감은 직업의 분화와 자기절제에 기반하여 감성적이지 않고 이성적인 노동(rational labor)을 하는 전문가 집단의 성장을 촉진하였다. 베버의 분석은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지만 서구의 자본주의 발전의 문화적 측면을 파헤친 고전적 연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의사들의 파업이 보여주는 정부와 의사들 간의 격심한 갈등은 전문가의 노동과 직업의 의미를 둘러싼 문화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유교적 정의감으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운동권 정부와 그 지지자들이 갖고 있는 전문가에 대한 인식은 지극히 중세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지난 몇 십 년 동안 한국사회는 산업화를 이루었고 비록 불완전하지만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발전하여 급속한 노동의 분업화가 진행되었으며 전문가 집단이 성장하였다. 그런데 운동권의 유교적 세계관은 전문가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전문가가 성실히 열심히 자기 분야에서 일하는 것 만으로는 사회에 기여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운동권의 관점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돈받고 일하는 것이지 사회정의 혹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동권 정부는 “공공의료”를 행할 의사를 양성할 ‘공공의대’를 별도로 설립할 계획이라고 한다. 의사들은 이에 대하여 분노하게 된다. 열심히 힘든 공부하고 의사가 되어 환자를 치료하고 때로는 온갖 위험 무릅쓰고 수면도 제대로 못취하며 죽어가는 환자를 살려놓는데 운동권 정부는 의사들이 공익에 기여함을 부정하고 돈 밖에 모르는 도덕적으로 열등한 이기적 집단으로 매도한다.  

아마 앞으로도 운동권 정부는 전문가 집단과 치열하게 싸울 것이다.  이 싸움은 명예를 독점하고자 하는 신양반 운동권과 명예를 획득하려는 전문가집단과의 싸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과연 운동권 정부가 내세우는 공공의 이익은 무엇인가? 예컨대,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듣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그 사람의 마음의 병을 치유해주는 대중가수는 공익에 기여하지 않는 것일까?  열심히 일하여 기업을 일군 성공한 기업가는 공익에 기여하지 않은 걸까?  자식 낳아 정성껏 사랑으로 키워낸 전업주부는 공익에 기여하지 않은 걸까?  누가 도덕적으로 우월한가?

🔺 김은희 교수는 서울대 의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문화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한국학 중앙연구원 전임 연구원으로 재직하며  일제시대의 가족변화에 관한 연구프로젝트를 수행한 바 있다. 주요 논문으로 “From Gentry to the Middle Class: The Transformation of Family, Community, and Gender in Korea”(박사학위논문), 「도시 중산층의 핵가족화와 가족 내 위계관계 변형의 문화적 분석」(『한국문화인류학』, 1995), 「문화적 관념체로서의 가족: 한국 도시 중산층을 중심으로」(『한국문화인류학』, 1995), “‘Home is a Place to Rest’: Constructing the Meanings of Work, Family and Gender in the Korean Middle Class”(Korea Journal, 1998), “Mothers and Sons in Modern Korea”(Korea Journal, 2001), 「대가족 속의 아이들: 일제시대 중상류층의 아동기」(『가족과 문화』, 2007) “도시 중산층 기혼여성의 취업과 부부 역할:’자기 일’의 정치학”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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