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비’는 페미니즘 영화인가. 명백한 페미니즘 영화다. 더 정확히 말하면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페미니즘 영화이며, 남성 중심적 사고 방식을 여전히 버리지 못한 남성을 비웃고 가엾게 여기기까지 하는 페미니즘 영화다.
다만 그레타 거윅 감독이 ‘바비’로 하려는 일은 페미니즘 혹은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를 참칭하며 남성을 적으로 돌린 뒤 성(性)을 갈라치려는 게 아니다. 이 영화는 당신이 여성이든 남성이든 간에 일단 생각부터 하라고 일갈한다.
특정 사상이나 철학을 주창하는 것에 앞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속한 사회가 어떤 곳인지 우선 숙고하라고 말한다. 우선 나의 내면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나부터 개조하지 못하면 페미니즘이든 뭐든 간에 변화는 시작조차 할 수 없다고 얘기한다.
코미디로, 뮤지컬로, 바비의 핑크로, 켄의 밍크로, 최대한 가볍고 따뜻하고 우스워 보이려고 애쓰지만 ‘바비’가 던지는 메시지는 묵직하고 서늘하며 예리하다. 바비랜드에 살던 바비가 그곳을 빠져 나와 도착한 현실 세계에서 자신이 어떤 (부정적) 의미를 가진 존재인지 알게 된다는 건 예상 가능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 영화 각본을 함께 쓴 거윅 감독과 노아 바움백 감독은 ‘바비’를 이정도로 끝낼 생각이 없다. ‘바비’는 현실을 목격한 뒤 당황한 바비를 바비랜드로 도피시킨다. 이제부터 영화는 도약한다. 바비와 함께 현실 세계를 맛본 켄이 가부장제를 학습한 뒤 돌아가 바비랜드를 남성이 지배하는 세계로 바꿔놓은 것이다. 이제 바비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켄덤(켄+킹덤)에 복속할 것인가. 아니면 바비랜드를 수복할 것인가.
바비의 결정에 관해 얘기하기 전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 있다. 바비랜드가 켄덤이 되기 전엔 어떤 모습이었냐는 것. 흥미로운 건 ‘바비’에서 바비랜드는 페미니즘이 완벽하게 실현된 공간이라는 점이다. 그곳은 여성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곳이며, 다양한 인종 다양한 체형의 여성들이 타고난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곳이다.
그리고 바비들은 자신들이 현실 세계 소녀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으며 세상이 자신들로 인해 더 나은 곳이 됐다고 확신하고 있다. 어찌됐든 현실 세계 속 여성의 위치와 무관하게 바비랜드의 페미니즘은 온전하고 굳건한 것처럼 보인다. 이랬던 바비랜드가 켄이 들여온 저 어설픈 가부장제 논리에 너무나 쉽게 붕괴돼버린다. 이 이상한 변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이 지점에서 ‘바비’의 오프닝 시퀀스를 다시 봐야 한다. 1959년 마텔사(社)가 내놓은 바비인형은 ‘바비’가 보여주듯 실제로 소녀들에게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하며 탄생했다. 여성의 역할은 출산·육아에 한정되지 않으며, 원하는 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게 바비의 캐치프레이즈였다.
‘바비’의 바비랜드처럼. ‘바비’의 오프닝 시퀀스가 보여주고 있는 게 바로 이 내용이다. 그러나 이런 의미를 담은 바비인형이 전 세계 소녀들의 손에 쥐어졌음에도 여성의 사회적 역할은 이후 수십년 간 크게 변하지 않았다. ‘바비’의 바비가 실제 세계 속 여성의 위치와 역할을 보고 당황하는 모습은 바로 이같은 현실을 상징한다. 바비랜드의 페미니즘은 바비들에게 부여된 이미지와 구호일 뿐 그들이 쟁취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의 페미니즘은 이처럼 허약하기에 켄이 들여온 유치한 가부장 철학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만다.
바비들이 각성하면서 켄덤은 다시 바비랜드로 복구된다. 그들의 변화는 여성이 어떤 존재인지 자각하고 학습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바비’는 단순히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를, 여성을, 페미니즘을, 사회를 공부하고 생각해서 내면화했을 때 그제서야 비로서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고 말한다.
다시 세운 바비랜드는 과거의 바비랜드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긴 하나 허울 뿐인 페미니즘이 횡행하던 바비랜드와는 전혀 다른 바비랜드가 돼 있다.
그리고 바비들이 개안(開眼)하게 하는 인물이 출산과 육아를 모두 경험하고 남성 권력자들에게 철저히 무시받아온 마텔의 비서 글로리아라는 건 의미심장하다. 글로리아가 현실 세계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맛본 굴욕과 부조리와 압박을 공론화하자 바비들은 비로서 연대를 결심한다.
‘바비’의 비범함은 이 이야기를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발 더 전진시키는 데서 온다. 바비랜드를 돌려놓은 바비(마고 로비)는 이제 바비랜드에서 벗어나 한 때 그가 도망쳤던 현실 세계로 다시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그가 살아온 바비랜드는 실제 세상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매우 작고 단순한 곳. 현실 속 가부장제는 켄의 가부장 철학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하고 치밀하며, 현실 속 인간들은 인형인 바비들보다 더 다양하고 복잡하며 모순적이다.
그리고 인간 세계엔 인형들에겐 없는 관계라는 게 있다. 거윅 감독은 바비의 페미니즘을 바비랜드에서 끝내지 않고 기어코 리얼 월드로 끌어들임으로써 진정한 변화를 도모한다. 이제 바비는 말한다. “만들어진 무언가로 남고 싶지 않아요. 전 의미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I want to be a part of the people that make meaning, not the thing that is made).
그리고 켄. ‘바비’는 가부장제에 취한 켄까지 보듬는 포용을 보여준다. 바비는 켄의 인정 욕구를 미처 챙겨주지 못했다는 걸 못 이기는 척 사과하면서도 다만 그 욕망을 남성다움이라는 엇나간 가치로 채우려고 하면 할수록 당신들은 사회에서 도태되고 말 거라고 얘기한다.
이때 ‘바비’가 켄에게 말하고자 하는 건 바비에게 하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내가 누구인지 생각하라는 것. 나의 가치를 누군가가 규정하게 놔두지 말라는 것. 물론 이 영화는 켄에게 이런 충고와 조언을 해주기 전까지 그들을 꿰뚫어 보고 실컷 비웃어준다. 바비가 함께 힘을 모아갈 때 켄은 전쟁을 벌이다가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지 못하기나 하니까.